영종·용유의 민족교육 자취
상태바
영종·용유의 민족교육 자취
강옥엽(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20.07.10
  • 1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옥엽(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전근대 교육의 대체는 각 지역마다 설치됐던 서당, 향교, 서원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영종·용유지역 교육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용유향교(龍游鄕校)의 존재가 있어 이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구한말 고종 때 향교 설립 기금을 갹출해서 작은 규모지만 용유향교(龍游鄕校)를 세우고, 매년 춘추 석전을 거행하며 명륜당에서는 유학을 강론했다고 한다. 현재는 공단재(孔壇峴)라는 이름으로 그 터만 남아 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 개항장에는 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청국조계·일본조계 및 각국공동조계가 생겨났다.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돼 갔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교육과 의료를 앞세워 선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감리교 내리교회는 영화보통학교, 영화여자보통학교 등 최초의 초등교육을 시작했고, 성바오로대성당도 박문학교, 고아원, 병원사업에 앞장섰다. 일본인도 자국민 교육을 위해 영사관에 인천영학사를 세우고 후에는 일어학교,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를 설립했다. 청국인도 인천화교소학교를 별도로 세워 운영했다. 조선 정부는 인천 감리서 내에 관립외국어학교(1895)를 설립해 국제화된 인천에 외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외국인의 교육기관 설립에 맞서 애국계몽기 인천의 유지와 민족운동가들은 일신학교(1899), 제녕학교(1903), 인명학교(1903) 등 민족교육을 실시할 학교를 설립했다. 

 바로 이 시기인 1899년 영종도에서도 일찍부터 소학교 설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1908년 경 ‘보명학교’(普明學校)에서 ‘인종학교’(仁宗學校)로 개칭했던 민족학교가 있었다. 황성신문 1899년 10월 13일 기사에 ‘영종 설교(永宗 設校)’라는 제목 아래 "인천감리 하상기가 영종진에 소학교를 설시(設始)하여 인민을 교육하겠다고 학부에 청원하였다" 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학교가 세워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9년 뒤인 1908년 6월 24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양교 운동 성황’이라 하여 "6월 16일 인천항 사립박문학교에서 영종도에 와서 보명학교(普明學校)와 성황리에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다"는 기사가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7월 19일 기사에 "(6월에)영종도에서 박문과 보명학교 연합운동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인천부윤 김윤정이 교육의 시급함과 권면함을 언급하는 연설을 했다. 이후 각 섬의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학교를 확장하기로 하고 교명도 인종학교(仁宗學校)로 개칭한다" 는 내용이 보도 되고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영종도에도 일제강점기 이전 일찍부터 유지들이 세운 민족학교 성격의 ‘보명학교’가 있었고, 뒤에 인천과 영종도에서 각 한 자씩 조합한 것으로 짐작되는 ‘인종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영종·용유 지역 근대 교육의 출발을 학교 설립 연원에서 찾아보면, 현재 가장 오래된 곳이 1920년 9월 개교해 100년의 역사를 지닌 영종공립보통학교(현 인천영종초등학교)이고, 그 다음이 1935년 12월에 개교한 용유공립보통학교(현 인천용유초등학교)이다. 그러나 1899년과 1908년의 신문기사 내용을 봤을 때, 1920년 영종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기 전 이미 영종·용유지역에도 민족교육을 담당했던 학교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근대 학교 교육 시작은 1900년대께로 소급해서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용유에서는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주민들의 항일운동이 교육을 통한 민족 실력 배양 사업 형태로 이어졌는데 혈성단원 이난의(李蘭儀)가 1925년 을왕리에 세웠던 ‘용유의 집’, 1926년 조종식이 남북리에 세웠던 ‘창신학교’ 등이 그것이다. 비록 일본의 방해와 재정난 등으로 폐교되고 말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이어져 1935년 4년제 용유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 전근대 해상교류의 거점이자 국방상 요지였던 영종·용유지역이 근대의 전환점에 민족교육을 통한 인재 육성에 노력했던 역사적 자취를 ‘보명학교’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