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나다운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로 구성됩니다. 사람에 따라 무게중심이 어느 한쪽에 다소 치우쳐 있습니다. 전자에 무게중심을 많이 두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면 ‘줏대가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곤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두 개의 ‘나’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황상민 교수는 「한국인의 심리 코드」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남에게 멋진 보통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남의 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고 체념’한다. 남의 시선에 의해 정해지는 정체성에는 자기 성찰이나 자기 탐색이 중요치 않다. 남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고,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려 한다."

 이쯤 되면 ‘나다운 나’는 사라지고 그저 남이 원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안타깝게도 노예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리민 선생이 쓴 「지혜의 한 줄」에 기억해둘 만한 우화가 나옵니다. 

 옛날 어느 왕국에 두 명의 왕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큰아들에게 어울리는 왕비를 찾아주려고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저는 마르고 날씬한 여자가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왕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너도나도 살을 뺐습니다. 몇 달 후, 왕국에선 더 이상 통통한 여인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는 사태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앞둔 왕자가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둘째 왕자에게도 왕은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왕자는 "요즘 여자들은 하나같이 말랐어요. 전 통통한 여자가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국의 미혼여성들 모두는 살을 찌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이젠 마른 여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왕자는 뜻밖의 선택을 했습니다. 마르지도 통통하지도 않은 한 여인을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왕자가 말했습니다. "외모에 치중하기보다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지닌 건강하고 현명한 여자가 좋습니다." 맞습니다. 남이 세워놓은 기준에 맞춰 살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지 못합니다. 오로지 남의 선택에 맞춰 수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어 스스로를 불행으로 밀어 넣을 뿐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동시효빈(東施效嚬)’이란 고사에서도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쪽에 사는 서시는 아름다웠고, 동쪽에 사는 동시는 추한 외모를 지녔습니다. 사람들이 서시를 흠모하자 동시는 서시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서시를 흉내 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느 날 가슴 통증을 앓고 있던 서시가 걷던 중에 통증을 느껴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찡그린 서시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는 서시가 아름다운 이유가 저렇게 찡그리고 다녀서 그렇구나, 라고 여기고 자신도 찡그린 얼굴로 다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동시가 나타나면 문을 걸어 잠글 정도로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황상민 교수의 말처럼, 타인의 시선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칭찬에 기뻐하고, 타인의 비난에 속상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겁니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아름다움과 재능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이란 ‘내가 보는 나’의 삶과 ‘남이 보는 나’의 삶이 일치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 타인이 봤을 때도 좋아 보이는 삶이 곧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다운 나’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나의 장점과 나의 아름다움을 찾고 당당히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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