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과 희극의 구분을 재현하는 대상의 차이에서 봤다. 진지한 사람을 다루면 비극, 다소 모자라거나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내세우면 희극으로 분류했다. 반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죽음으로 끝나면 비극이고, 결혼으로 끝나면 희극이라 했다. 이 경우 결혼은 축제와 환희 같은 희극적 맥락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결혼이 늘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인내와 배려의 덕목이 결혼생활을 지속시킨다. 영화 ‘45년 후’는 45년째 함께 살고 있는 부부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오랜 결혼생활로 서로의 습관이나 건강상태, 하루 일과 등을 줄줄 꿰고 있는 노부부.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호젓한 교외에서 평온한 일상을 사는 케이트와 제프. 이들의 45주년 결혼기념일 파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5년 전, 제프의 뇌혈관에 문제가 생겨 수술하는 바람에 이들은 40주년 파티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딱 떨어지는 40주년 혹은 50주년이 아닌 그 사이인 45주년을 기념하게 됐다. 

로맨틱한 파티 준비로 들뜬 케이트의 기분은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면서 차갑게 얼어붙는다. 서신에는 남편이 ‘나의 카티아’라고 부르는 첫사랑의 소식이 담겨 있었다. 50년 전, 그러니까 부인인 케이트와 만나기 전 제프는 카티아와 알프스 트레킹에 나섰다. 그러던 중 카티아가 실족사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그 시신이 50년 만에 빙하 속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남편이 그 여인을 수차례 ‘나의 카티아’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지나가는 해프닝 정도로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프의 방황은 생각보다 길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고, 다락에 올라가 카티아의 사진을 찾아 뒤적이고, 지구온난화가 빙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을 사서 읽더니 급기야 스위스행 티켓까지 알아보고 다닌다. 이런 제프의 행동이 케이트에겐 낯설고 한편으론 괘씸하다. 반면 제프는 젊은 시절의 추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내가 불편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여전히 다른, 아직도 상대에게 모르는 것이 남아 있는 부부. 과연 두 사람은 45주년 파티를 기념할 수 있을까?

영화 ‘45년 후’는 결혼 45주년을 기념하는 축하파티가 벌어지기 일주일 전, 한 통의 편지로 흔들리는 부부의 일상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그 결과 대단히 섬뜩하고 숨막히는 공기가 작품을 꽉 채우고 있다. 70대 부부는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인 감정을 내보이기보다는 일면 담담하고 묵묵하게 상황을 수습해 간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마음에 일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차곡차곡 쌓여 마지막에 커다란 한 방으로 다가온다.

기념일 전날 밤, 아내는 남편에게 저녁 먹고, 약도 챙겨 먹고, 잘 자고, 다음 날 일어나 새로 시작하자고 한다. 이에 남편도 그럴 수 있다고 다짐한다. 그러고는 예전보다 더 살뜰하게 아내를 챙긴다. 그렇게 영화는 일단락된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두 사람의 일상은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갈지언정 마음에는 파도가 인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흘러야 잔잔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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