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조선 후기 정치행정가 손와(損窩) 최석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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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선 후기 정치행정가 손와(損窩) 최석항
당쟁 격랑에 휩쓸려 편 가르기보단 소통하려 노력했다네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7.21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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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호평동을 감싼 듯 자리잡은 천마산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이뤄 준다는 산벚나무와 서어나무 연리목을 비롯해 수많은 야생화가 연무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여기에 조선후기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1654~1724) 부자가 잠들어 있다.

그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손자이며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후원(崔後遠)에게 입양됐다. 10번 이상 정승으로 임명됐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동생이며, 두 형제가 모두 정승을 지낸 경우는 조선에서 흔치 않았다.

그는 강화도 참성단을 중수해 오늘에 이르게 했고, 경종이 동생 영조에게 섭정하라는 명을 내리자 한밤중에 대궐로 들어가 철회시키는 등 18세기 초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소통의 대가인 최석항을 만나 본다. 

최석항 선생의 금관자·옥관자와 옥으로 된 갓끈. 조선에서 높은 신분임을 상징하는 장신구이다. 상아 호패<오른쪽>.
최석항 선생의 금관자·옥관자와 옥으로 된 갓끈. 조선에서 높은 신분임을 상징하는 장신구이다. 상아 호패<오른쪽>.

# 약골의 책벌레

최석항은 어린 시절 허약해 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래서 10살이 돼서도 글공부를 시작하지 못했다.

10대 후반 늦은 학업에 각고의 노력으로 밤낮 없이 공부했지만 친어머니의 상을 만나 삼년상을 치르고 26세가 돼서야 진사가 됐고, 27세 과거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병약했던 그는 체구가 왜소했지만 공무 수행에는 대담했고, 자신의 안위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33세 때 평안도 어사로 임명된 최석항은 평탄한 대로로 다녔던 보통의 어사들과 달리 백성들의 실정을 제대로 살피는 본분을 지키기 위해 산간벽촌을 골라 찾아다녔다. 하루 종일 산중을 헤매기도 하고, 길을 잃고 밤새 걷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만큼 올곧게 공직을 수행했다.

# 따뜻한 인간미와 융통성을 지닌 최석항

최석항은 높은 지위에도 약자에게 너그럽고 생명을 중시했다.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직원과의 첫 인사 자리에서 한 기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비장들이 엄하게 문책하려 했지만, 그는 웃으며 "내 모양이 원래 볼품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탓할 것 없다"며 중단시켰다.

또 한 번은 밥상을 받고 공기밥 뚜껑을 열었는데 지네가 나왔다. 감영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 모두 놀랐고 두려워 떨고 있었지만, 그는 태연히 젓가락으로 지네를 치우고 편히 밥을 먹고는 아무 일 없던 듯 일어났다.

금위영의 말을 사적으로 빌려줬다 갑작스러운 훈련으로 말을 채워 넣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아전에겐 아무 말 없이 말을 내주기도 했다. 군율이 엄해 아전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처지를 이해한 인자한 그였지만, 아첨을 하거나 부정한 사람은 즉시 내치는 엄정한 관리였다.

최석항 선생 종가에 전하는 여러 인장들. 종손인 최종원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
최석항 선생 종가에 전하는 여러 인장들. 종손인 최종원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

# 팔도의 지방관 중 최고로 평가받다

최석항은 1703년(숙종 29) 평안감사로 부임했다. 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중국 북경으로 가는 길목이라 장사꾼들의 왕래가 많고 무역도 활발해 당시 지방관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임한 관리들은 감영의 재산을 장사꾼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개인 수입으로 챙겼다. 변방의 무관들 역시 군사 훈련과 무기 수리보단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고 군량미를 착복하는 데 힘썼다. 그만큼 모든 재물은 장부상에만 존재했고 실제 창고는 텅 빈 상태였다.

최석항은 토지대장을 정리하고 세금을 공평하게 거뒀다. 산과 강, 도로와 지세(地勢)를 조사해 지도를 만들고 군사와 조선 등 국가 업무에 관계되는 비용 장부를 정리하는 등 국방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의 정치·행정의 원칙은 청렴함과 간결함이었다. 국가 사무를 처리하고 개인적인 처신에 있어서 검약(儉約)하고 겸손했다. 잘못에 대한 문책에 앞서 관리자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도민(道民)이 잘 사는 것이 중심이었다.

그는 절대 권력자에게 역할도 주문했다. 세종대왕처럼 성군을 본받아 큰 뜻을 세우고(立大志, 입대지), 성현의 학문을 성심을 다해 배우고(誠典學, 성전학), 사사롭고 개인적인 감정을 극복하고(克私己, 극사기), 독단적인 판단을 자제하고 도량을 갖추고(恢聖量, 회성량), 당쟁에 관계되는 신하들의 말을 따져서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인재를 고루 등용할 것(和朝論, 화조론) 등이다. 

이런 최석항에게 숙종 임금은 "문학은 형(최석정)보다 못하지만 행정과 정치하는 재주는 형보다 훨씬 낫다"며 팔도 최고의 지방관으로 평가했다. 

1. 아들 최창억이 기록한 최석정의 일대기. 2. 최석항 선생의 친필 시문집. 종손 최종원 선생 소장. 3. 최석항의 생부 최후량의 친필 편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 아들 최창억이 기록한 최석정의 일대기. 2. 최석항 선생의 친필 시문집. 종손 최종원 선생 소장. 3. 최석항의 생부 최후량의 친필 편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 당쟁의 파고에 따라 사면과 복권을 반복하다

최석항은 평생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고, 높은 지위에도 아랫사람이 시중 들게 하지도 않았다. 90이 넘은 노모에게 직접 음식을 드렸으며, 노모의 대소변 묻은 옷을 직접 세탁하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냈다.

최석항은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유언으로 문집을 간행하지 말고 신도비도 세우지 말며, 묘표도 쓰지 말고 시호를 요청하지도 말라고 했다. 소론의 영수이자 오랜 시절 정승을 지낸 사람답지 않게 그의 묘역은 간소하다. 근사한 신도비는커녕 묘표석도 없다. 

그가 국가 중요 지위에 있던 조선후기는 당쟁의 격랑 속에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었다. 최석항은 정파가 달라도 함부로 옥사를 일으키거나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숙종대 이후 고종대까지 삭탈과 복권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했던 그다.

조선후기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鄭齊斗)는 "선생(최석항)은 국량이 깊고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기품이 조부인 지천(遲川, 최명길)선생을 닮았다"라고 평가했다.

최석항은 ‘無不可對人言(무불가대인언, 평생 남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이라며 늘 자신은 남에 비해 특별히 잘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와도 대화하려 했고 어떤 말이라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장과 처지가 다를 수 있지만 편을 갈라놓고 감정적 대치를 보이는 현대의 사회 양상을 보면서 최석항의 ‘소통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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