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시에 위치한 ‘회암사’는 ‘하늘이 내린 보배’라는 뜻의 천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회암사의 창건 및 폐사에 대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고려시대 고종 41년(1254년) 문신 최자가 엮은 시화집인 「보한집(補閑集)」에서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12세기 후반 이전에 회암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조선 초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당시 크고 웅장한 모습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중국에서도 찾기 힘든 자태였다고 한다.

특히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를 머무르게 하고,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궁실을 짓고 수도생활을 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현재 시는 역사의 상흔을 견디며 터만 남은 ‘회암사지’의 세계유산(유네스코) 등재를 추진 중이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회암사의 역사적 가치와 추진 방향을 조명해 본다.

하늘에서 바라본 회암사지 전경.
하늘에서 바라본 회암사지 전경.

# 회암사의 역사 

국가 사적 제128호인 회암사는 고려시대 인도 출신의 승려 ‘지공’에게서 해당 지역에 절을 지으면 불교가 번창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제자 ‘나옹’이 1374년(공민왕 23년) 중창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색의 문집 「목은집(牧隱集)」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당시 중창의 규모가 각전은 건물 262칸, 15척(약 4.8m)의 불상 7구, 10척(약 3m)의 관음상 등이라고 기술돼 있다.

이후 공양왕은 1391년 2월 회암사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킬 정도로 고려 왕실은 회암사에 각별한 후원을 했다. 조선시대에도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속에서도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가 머물 정도로 조선 왕실의 지원이 있었고, 1400년대와 1500년대에 걸쳐 증수했다. 

회암사는 연산군의 불교 탄압을 극복하고 명종대 다시 부흥기를 맞아 문정왕후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불교계의 통합을 도모하던 승려 ‘보우(普愚)’로 하여금 불교세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 1565년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회암사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계획했다가 반발에 부딪혔다. 무차대회는 승려·소인·남녀노소 귀천의 차별 없이 일반 대중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고루 나눠 주는 법회로, 당시 계급사회의 특성상 불만이 폭주한 것이다.

여기에 갑작스러운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제주도로 유배된 보우가 끝내 죽게 되면서 회암사의 사세가 기울며 폐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66년(명종 21년)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문구와 1595년(선조 28년) ‘회암사 옛터에 불에 탄 큰 종이 있는데, 조총을 주조하는 데 가져다 쓰자’고 건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폐사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실제 발굴조사에서도 담장지와 불상 파편들의 형태와 위치로 보아 폐사의 원인이 화재였음이 입증되기도 했다.

회암사지 발굴조사 현장에 건축물 조형을 배치하기 전
회암사지 발굴조사 현장에 건축물 조형을 배치하기 전

# 회암사지 발굴의 의미

양주시는 1985년 지표조사를 거쳐 회암사지 정비사업을 위해 1990년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시굴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2015년까지 총 12차례에 걸쳐 조사를 진행했다. 신앙, 수행시설, 생활시설 등 주요 건물지와 회랑, 별원, 창고 등 부속건물지를 포함한 71개 건물지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이 외에도 시는 2012년 회암사지박물관을 별도로 건립하고 유적 정비 등 ‘회암사지 종합정비사업’을 실시하면서 가치를 보존·승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회암사지는 동아시아에서 만개했던 선종의 국제적 유행과 사원의 구성 방식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탁월한 고고유적이다. 회암사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승려들의 부도, 석등, 비석이 발굴돼 선종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장소였음을 보여 준다.

특히 선종의 규칙을 담은 문서인 ‘청규’를 건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선종의 승려들은 신앙과 수행에 필요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물리적 시설을 구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회암사지는 청규에 나오는 사원건축의 구성요소를 14세기 고려 불교가 수용했음을 보여 준다. 회암사를 구성하는 사원의 목조건축물은 17세기 이후 사라졌지만, 그 기초가 되는 하부 구조물은 폐사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서 14세기 중창된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종 사원의 전형을 보여 주는 탁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두 번의 등재 도전 실패, 칠전팔기 정신

시는 2016년부터 역사문화도시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회암사지, 지공·나옹·무학 부도 및 석등, 비석 등 유산구역(6만166㎡), 완충구역(26만8천286㎡) 등에 대한 유네스코 등재 추진계획을 수립했다. 자체 연구를 비롯해 한국건축역사학회, 세계유산 전문가 등의 자문을 거쳐 2018년과 2020년 문화재청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부결됐다.

하지만 시는 올 1월부터 5월까지 별도의 전문가 자문을 얻고 예산을 확보해 연구를 진행한 결과 지난달 문화재청 세계유산 잠정목록 연구지원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등재 추진에 희망을 갖게 됐다.

회암사지 발굴조사 현장에 건축물 조형을 배치하기 후.
회암사지 발굴조사 현장에 건축물 조형을 배치하기 후.

# ‘탁월한 보편적 가치’ 내세워 유네스코 등재 총력

유네스코 등재 기준은 문화유산 6개, 자연유산 4개 등 총 10가지 기준으로 나뉜다. 문화유산의 경우 창조성, 인류의 교류 및 특정 문화권, 문화적 전통 및 소멸 문명과의 관계와 특출한 증거, 인류 역사의 단계, 인간 간 상호작용으로 인한 정주지, 보편적 중요성을 지닌 사건 또는 전통 등이다. 

이 가운데 시는 ‘문화적 전통 및 소멸 문명과의 관계와 특출한 증거’ 기준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전략으로 등재를 추진 중이다. 그간 부결 심의에서 지적된 발굴 유구의 중심시기(조선시대)와 유산의 핵심 가치(고려시대) 불일치, 문헌과 출토 유물 등의 진정성 부족 등을 개선하기 위함이다. 

시는 보존관리 상태가 양호하고 유산의 원형을 유지한 점을 들어 진정성을 확보하고, 일본 선종 사원 비교연구 보완과 건축 배치 중요성에 대한 보강에 나서고 있다.

김동규 양주시 박물관미술관팀장은 "올해까지 제안서 입찰과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내년 상반기 보완한 등재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라며 "역사적 가치를 전파하려는 작은 관심에서 시작한 유네스코 등재 도전이 반드시 성공해 지역의 문화적 가치가 상승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양주=전정훈 기자 jjhun@kihoilbo.co.kr

김상현 기자 ksh@kihoilbo.co.kr

사진=<양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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