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코로나19 이후 가장 극심했던 시민의 동요는 미국 백인 경찰의 과잉제압에 무고한 흑인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종차별에 반발한 흑인 소요는 미국 전역으로 번져 도시 약탈 등 심각한 사태에 이른다. 사실 이번에 표출된 것은 인종차별이었지만 다민족 국가인 미국 내에서 갖가지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공연연한 비밀이다. 그렇다면 의문은 왜 미국과 같은 민주 국가에서 차별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왜 인류는 끊임없이 차별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일 것이다. 차별이 없는 세상은 이상(理想)이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뿌리 박혀 있는 것은 현실(現實)이다. 차별이 국민 통합이나 발전을 위해 장애가 되는 것은 상식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차별은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차별은 계급을 만들고 계급은 기득권을 만들어 낸다. 

사실 인종차별은 피부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 설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계급을 분명히 함으로써 하위 계급으로부터 기득권을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별이 크게는 인종 간에 일어나지만 작게는 민족 사이에서 그리고 신분계급 차이에서 나타나게 된다. 중세까지만 해도 주로 전쟁포로나 적군의 아녀자들을 포획해 노동력 대체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래서 그들을 하층 노예 계급으로 철저히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던 것이다. 그후 근대 산업혁명으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값싸게 부릴 수 있는 인종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야만과 같았던 유색인종이었다. 

조선말 1890년 윤치호 선생은 미국 여행 중 일기에서 백인의 민족적, 인종적 편견을 지적하면서 인종차별을 극히 절감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동양인에 대한 백인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자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일본과 전쟁했던 중국조차 일본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된다. 처음으로 야만의 동양인들이 문명의 서양인을 물리친 것이다. 백인이 동양인들에게 이럴진대 흑인에게는 노예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예 해방을 표방한 링컨 대통령 이후 루터 킹 목사나 여러 흑인 민권단체에 의해 흑인 위치는 형식이나마 격상되고 있으나 내면으로는 극우단체인 KKK단의 존재와 같이 미국 사회 내부에서 아직도 백인 우월주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종차별적 감정들이 폭동진압과 같은 사태에 있어 무의식 중에 과잉진압 등으로 표출되고 있지 않나 싶다. 같은 인종도 민족끼리 차별화하게 마련이다. 예컨대 게르만민족이 타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나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극심해지게 되면 유태인 학살이나 유고의 코소보사태처럼 타 민족의 청소로 나타난다. 이렇듯 과도한 민족주의는 전쟁의 빌미를 주기도 하지만 자국민을 하나로 묶어 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물론 같은 민족 내에서도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차별은 신분 계급으로 존재하게 된다. 소위 신분제를 만들어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제도로서 만들어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학벌사회, 능력사회, 혹은 금권사회 등 수많은 명분을 만들어 신분을 형성하게 되고 이를 계급으로 엮어 권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에 달하면 근대 초기 산업혁명에서처럼 약간의 빵을 얻기 위해 열악한 공장에서 숙식하며 일 만하는 어린 노동자들과 같이, 노예와 다름없는 하층 노동자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계급사회를 간파한 이가 바로 칼 마르크스이고 행동으로 나선 집단이 바로 공산당이다. 결국 정작 중요한 것은 신분 변화가 유연한 사회 제도이다. 즉 차별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차별을 인정하고 계급에 상관없이 개인의 신분이 노력과 능력에 따라 쉽게 이동하는 사회 시스템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신분상의 이점이 없다면 누가 일을 할 것이고 노력을 할 것인가. 

피부색이나 민족의 차별이 아니라 능력에서 차별을 둬야 할 것이고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가 마련되면 되는 것이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회는 조금도 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슘페터는 이를 혁신이라고 불렀다. 가르고 차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모든 식민지를 로마의 시민으로 대했던 로마가 오랜 세월 세계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겉 모습에 의한 차별은 국가를 망치지만 개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차별은 오히려 사회를 진보시킨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차별속의 평등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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