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숙신도시, 양정역세권 개발 등 남양주는 수도권 거점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대규모 개발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유적들이 사라진다는 아쉬움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양정동은 조선후기를 움직인 역사인물들의 유적이 많기로 유명하다. 용인이씨(龍仁李氏) 묘역도 그 중 하나인데, 숙종대에 좌의정을 지낸 우사(雩沙) 이세백(李世白, 1635~1703), 영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 1669~1745)부자 등이 잠들어 계신다.

이의현은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이다. 17세기 후반 문형(文衡)을 잡았던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수제자로, 금촌(金村) 마산리(현 양정역 인근)의 북계정사(北溪精舍)와 서울을 오가며 관료생활을 했다.

그의 부친 이세백은 송시열을 유배 보내라는 임금의 명령서를 쓰지 않아 파직되고, 장희빈이 사사될 때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세자의 부탁에도 옷을 떨쳐 버리고 피한 일화 등에서 보듯 서인의 핵심 인물이다. 

이의현은 풍양(남양주 옛 지명) 성릉사(成陵寺, 현 진건읍에 소재했던 사찰)에서 김창협에게 경전을 배워 낙론(洛論)의 학문 전통을 이었다.

도곡 이의현의 묘소. 박지병 정려각 등과 함께 양정역세권 개발계획으로 곧 사라질 역사 유적 중의 하나이다. <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도곡 이의현의 묘소. 박지병 정려각 등과 함께 양정역세권 개발계획으로 곧 사라질 역사 유적 중의 하나이다. <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 간서벽(看書癖), 장서벽(藏書癖), 기록벽(記錄癖)

이의현은 자신의 삶을 열정을 담아 치밀하게 기록하고, 그 기록에 의미를 부여했다. 자신이 꼼꼼하지 못하고 우활하며 사리에도 밝지 못한 데다가, 분잡스럽고 화려한 도시문화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벽(癖)’이 있다고 했다.(이의현, 「운양만록(雲陽漫錄)」 중에서)

이의현은 15세에 결혼한 이후 지방관으로 근무하는 부친 이세백을 따라 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며 자신의 정감을 시문으로 처음 남긴 「형탑록(螢榻錄)」을 시작으로 연대 순으로 16종의 시집을 엮었다. 일기(日記), 일록(日錄), 일대기 등의 형식으로 자신의 평생을 기록한 것이다.

이의현은 1722년(경종 2) 경종의 시해를 음모한 것에 연루됐다는 탄핵에 평안북도 운산으로 유배 갔다. 2년 7개월 동안 매일 하루에 읽을 경전과 고전을 정해 읽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읽고 생각나는 대로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벼슬길의 쓸쓸함,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인물평, 읽었던 책의 소감 등 짤막한 일상생활 정감이었다. 그렇게 쓴 것이 580여 항이니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쓴 셈이다. 

중국에서 구입한 52종 1천342권의 책명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298개의 성씨까지 조사하고 기록했다. 이는 후대에 이덕무(李德懋), 이규경(李圭景) 등 실학자의 학술적 참고가 됐으니 이의현의 간서벽, 장서벽, 기록벽은 세대를 지나 지식인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할 수 있다.

도곡 이의현의 초상.
도곡 이의현의 초상.

# 열린 세상으로 세계관을 확장하다

그가 살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고,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던 청나라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국제적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회였다 할 수 있다.

이의현은 두 차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청나라 문물을 접하고 인정했다.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백성은 우아하고 사치스러울 정도였으며, 시가지 상점마다 간판과 현수막을 내걸었고 음식·서화·공구 등 팔지 않는 것이 없는 시장이었다. 특히 건축기술, 기계, 종이, 가축 사육, 난방시설, 연료 등 산업적인 면에서 우리나라가 따라 갈 수 없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당시의 지식인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라 비판하며 중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역사책을 집집마다 공부하고 중국에서 인정받지 않던 서예가를 추앙하는 현실을 보면서 조선 학자의 편향성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이의현, 「도협총설」 참조)

이의현의 문화적 유연함은 소설(小說)에 대한 인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외설스럽고 음탕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소설을 멀리했던 사대부들에 견줘 그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글쓰기 양식으로 소설을 이해하고 정사(正史)에서 듣지 못한 글과 빠진 사실들을 많이 기록해 역사를 보완하는 기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의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견해였다.

이는 18세기 초까지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성향으로, 강대국인 청나라를 부정하던 일반 사대부들의 경직되고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 슬픈 가족사를 딛고 일어서다 

이의현은 관료로서 영의정까지 올라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학문적으로도 후대에 많은 귀감을 줬다. 기로소(耆老所)까지 들었으니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성공의 화려함 이면에는 서글픈 가족사와 개인적 불운이 상존했다.

그는 세 명의 부인을 뒀다. 15세에 결혼한 어 씨 부인과 17년 만에 사별하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2남 2녀는 모두 요절했다. 두 번째 부인인 송 씨는 47세 늦은 나이에 아들 이보문을 낳기도 했지만 30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1.이의현이 지은 ‘기로소제명록’. 이의현은 영의정으로 기로소에 들었다.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2. 도곡 이의현의 필체를 보여주는 간찰. 3. 이의현 시문을 모아 놓은 시문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이의현이 지은 ‘기로소제명록’. 이의현은 영의정으로 기로소에 들었다.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2. 도곡 이의현의 필체를 보여주는 간찰. 3. 이의현 시문을 모아 놓은 시문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 번째 유씨부인과도 결혼해 딸 4명을 낳았지만 2명이 요절했다.

3명의 부인과 결혼해서 3남 9녀를 낳았지만 이 중 장성한 자녀는 딸 3명에 불과했으며, 이의현의 유언으로 세 명의 부인과 함께 묻혀 있다.

이의현은 1747년(영조 23)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 붓을 내려 놓으며 ‘절필(絶筆)’이란 시를 지었다. ‘옛것을 좋아하는 초심으로 속된 기운을 벗고자 했는데(嗜古初心脫俗분), 우둔하고 졸렬해 늙도록 알려지지 않으니 부끄럽네[참愚劣老無聞]’(이의현, ‘절필’ 중에서) 

자신의 삶을 ‘고아(古雅)’함을 좋아했던 사람으로 정의했고, 손자 학조(學祚)에게 ‘물체독서종(勿替讀書種)’ 즉, 독서하는 유전자를 버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영조는 이의현에게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고(勤學好問曰文), 정직하여 사특함이 없다(正直無邪曰簡)’라고 하며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모든 것을 빠르게 잊어가기만 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차곡차곡 기록하며 생의 의미를 부여했던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언지 생각해 본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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