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정약용이 높게 평가한 평내동의 ‘다산 선생’ 목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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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정약용이 높게 평가한 평내동의 ‘다산 선생’ 목대흠
붓 하나로 명나라 마음 훔치고 한 구절로 명필들 무릎 꿇리다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9.01
  • 2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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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능천(思陵川)이 휘감아 돌고 천마산과 백병산이 두르고 있는 평내동에는 역사인물과 유적이 많다. 

이 중 평내동 사천목씨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린 현헌(玄軒) 목세평(睦世枰)을 시조로 한다. 특히 목첨의 셋째 아들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 1575~1638)은 정약용 선생도 높이 평가해 주목받았다.

다산 목대흠의 문집(왼쪽)과 친필. 목대흠은 차천로 등과 쌍벽을 이루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국립중앙도서관·박물관 소장>
다산 목대흠의 문집(왼쪽)과 친필. 목대흠은 차천로 등과 쌍벽을 이루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국립중앙도서관·박물관 소장>

# 청렴(淸廉)의 가문(家門) 사천목씨(泗川睦氏)

목세평의 아들 목첨(睦詹)은 평내동 사천목씨를 중흥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 병약해 과거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홀로 옛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후 대사간(大司諫), 한성우윤(漢城右尹)까지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첨은 78세의 나이로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의병을 모으고 ‘일의군(一義軍)’이라 명명, 왜군과 맞서 싸웠다. 곧이어 임금을 구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신의주로 이동하던 중 병이 심해져 죽고 말았다. 

목첨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검소했다.

관료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목첨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가마니로 가린 대문을 들어서니 어떤 아이가 마당 한쪽에 서서 공손하게 인사하며 맞아줬는데, 그 아이는 여기저기 헤진 곳을 꿰맨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를 노비라 생각한 손님이 마침 퇴근하는 목첨에게 묻자, 목첨은 자신의 손자라며 인사를 시키면서 껄껄 웃었다.

이처럼 목첨은 대문 없는 집에 살고, 타고 다닐 말이나 수레도 없었고, 재물을 쌓아 놓지 않았다. 

목첨은 자식들에게 일찍 일어나는 것, 선을 좇는 것, 망령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학문의 첫 번째로 가르쳤다. 

그의 학문적 안목은 퇴계 이황 선생을 발탁, 임금에게 추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황은 학문이 해박하고 공부가 독실하니 응상 불러 올려서 경연의 직임을 맡기면 반드시 우리 학문을 발전시킬 수 있다"며 즉위 첫해를 맞이하는 선조(宣祖)에게 추천했다.

목첨의 큰아들 목서흠(睦敍欽)은 백성에게 해로운 일이 있으면 남김없이 말하지 않은 적이 없고, 대부분 수용될 정도로 윗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다. 

개성유수로 나가 포은 정몽주의 선죽교를 중수하고 선비들을 분발시켰으나 돌아올 때는 빈 행낭 하나만 가져왔던 목장흠(睦長欽)도 목첨의 아들이다.

사천목씨 재실인 현헌재 현판. <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사천목씨 재실인 현헌재 현판. <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 문학가로, 외교가로, 지방관으로 백성의 사랑을 받다

정약용 외에도 후세에 ‘다산(茶山)’으로 불린 목대흠.

목대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세계사적 전란이 일어나 고통에 휩싸인 시대에 살았다.

그는 외교가로 중국에서 먼저 이름을 떨쳤는데, 동지사(冬至使)가 돼 사신으로 명나라 수도인 베이징에 갔을 때 중국 관료들은 목대흠을 ‘예의를 잘 익힌, 준수하고 훌륭한 대부’로 평가했다. 

"강남 풍속은 재능 있는 인재를 중시하며(江南風俗重才華)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글·글씨 구하네.(爭擲蠻전索筆花) 가는 곳마다 붓을 들어 휘둘러 써주니(到處忘疲揮醉墨) 몇 집에 누구에게 써 주었는지 셀 수 없네.(不知留壁幾人家)" (‘중국 사람들이 시와 글씨를 써 달라 하여 거칠게 벽에 써주다’ 중) 

목대흠의 처신과 언행을 보고 중국인들은 외교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수많은 중국인들이 그의 작품을 받아 간직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인조반정 이후 병자호란 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제적 정치질서가 급변하는 시기에도 외교가로서 면모를 드러냈다. 명나라 무장인 모문룡이 1629년(인조 7) 가도에 주둔, 조선이 주변국과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겪을 때 목대흠이 이를 외교적으로 풀어냈다.

목대흠은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시인들이 모여 시 짓기 겨루기가 벌어졌을 때, 차천로는 시상을 잡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을 때 목대흠은 이미 시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본 차천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버렸다’(「다산집(茶山集)」 서문 중)는 일화가 당시에 회자됐다.

이 일화는 17세기 조선의 대표 시인인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문장가 목대흠을 간단히 설명해 준다.

목대흠은 지방관으로서도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1633년(인조 11)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해 고을을 관대하게 다스렸는데, 단정하고 깨끗하며 이해득실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없어 백성들이 매우 존경했다. 목대흠이 강릉을 떠날 때 그 지역 백성들은 유애비(遺愛碑)를 세우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을 정도였다.(목대흠의 묘지명 중에서, 허목) 

남양주 평내동 사릉천 일원 얕은 산에 자리잡은 사천목씨 묘역에는 목세평, 목참 등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남양주 평내동 사릉천 일원 얕은 산에 자리잡은 사천목씨 묘역에는 목세평, 목참 등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 정약용이 높이 평가한 ‘평내동 다산 선생(茶山先生)’

정약용(1762~1836)은 같은 고장 인물이자 훌륭한 선배로 목대흠을 높이 평가했다.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 날마다 쓰는 모든 물건들을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서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전들은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평소 게를 좋아했던 목대흠은 큰 항아리 속에 게 수백 마리를 절여 두고서 아침저녁으로 먹었다. 어느 날, 관사의 운영을 담당하는 아전이 게가 떨어졌다고 보고하였다. 목대흠은 ‘아직도 두 마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전은 당황했다. 황급히 물러나와 항아리 속을 뒤져 보았다. 과연 아주 작은 게 두 마리가 젓국 속에 들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아전들은 장부 처리에 털끝만큼도 숨기는 일은 없었다"(「목민심서」 ‘율기’편 중, 정약용)

정약용은 목대흠의 일화를 통해 부하 직원들이 장부 기록과 물품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절용 즉, 절약을 강조하고 있다. 소요되는 것과 소요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면 낭비되는 것을 막고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으며, 효과적인 쓰임과 낭비하지 않는 것이 절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낭비되지 않고 정확한 쓰임을 이룩한 선배 관료로 목대흠을 평가한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남양주 사람 목대흠에 대해 일화로만 가벼이 넘기지 않고 가치를 분명하게 살려냈다. 이는 ‘남양주의 사람이 조선의 가치’임을 보여 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자료=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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