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산을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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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을 오르며
황흥구 인천광역시행정동우회 부회장/수필가
  • 기호일보
  • 승인 2020.09.07
  •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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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흥구 인천광역시행정동우회 부회장
황흥구 인천광역시행정동우회 부회장

새벽에 극성스레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일찍 깨었다. 열대야 때문에 얇은 담요도 내치며 안방과 거실을 오가던 때가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처서가 지나니 매미도 물러나는 여름을 못내 아쉬워하는가 보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잔뜩 흐린 날씨에 또 비가 오려는지 나뭇가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올해는 참 비도 많은 여름이다. 비가 오기 전에 등산화 끈을 질끈 매고 황급히 뒷산을 올랐다. 십여 년 전 고향인 이곳으로 이사 오고부터 틈만 나면 오봉산을 오르고 있다. 어렸을 적 오봉산은 하늘 다음으로 높은 경외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다니 꿈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봉산’은 인천의 진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남동구에서는 소래산과 관모산, 만월산과 함께 남동구를 포근히 싸안는 어머니 품 같은 산이다. 도림동과 논현동에 걸쳐 있으며 산세는 높지 않지만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어 오봉산으로 부르고 있다. 오봉산을 올라가려면 여러 군데의 등산로가 있지만 ‘호구포’쪽에서 올라가는 오봉산 들머리격인 ‘듬배산’이라는 산부터 시작한다. 이 산을 찾을 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산 끝자락에 지금은 택지개발로 이전하고 없어진 내가 다니던 ‘논현초등학교’가 있었다. 

가을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들은 농사일도 멈추고 인근 ‘한국화약’공장이나 ‘남동염전’도 한나절만 일하고 모처럼 가족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운동장 위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솜사탕 먹는 재미와 마지막으로 어른들 동네대항 계주경기가 열릴 때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예전엔 민둥산이었던 이곳이 이렇게 울창한 숲으로 변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60년대 산림녹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일 때 가끔 아버지를 따라 이쪽에 와서 사방공사와 나무를 심기도 했다. 주로 속성인 아카시아와 오리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일을 마치면 미국 원조물자인 밀가루를 받아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발길을 옮겨 오봉산으로 향한다. 어릴 적 오봉산에 대한 기억은 봄에는 학교 갔다 돌아오면 친구들과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산자락에 하얗게 깔린 아카시아 꽃잎을 따 먹으러 다녔다. 여름엔 숲속에 나무들을 칭칭 감고 올라간 칡넝쿨 밑동을 힘껏 잡아당겨 칡뿌리를 캐 먹던 일이며 가을이면 영글지도 않은 밤을 따러 온 산을 휘졌던 때가 불현듯 떠오른다. 등산로 양편으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쑥쑥 올라온 전나무와 아름드리 소나무 그리고 형형색색의 진달래, 철쭉꽃은 예전보다 더 화려하고 풍성하다. 혹시 내릴지도 모를 비를 피해 이른 새벽에 올랐는데도 벌써 산을 내려오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꽤 많다. 겨우 한 시간도 채 못 올라갔는데 빗방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큰 소나무 밑을 찾아 앉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앞날에 펼쳐질 내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동안 내 삶의 전부였던 오랜 공직생활을 부끄러움 없이 마무리할 수 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앞으로 100세 시대에 보람 있는 삶은 무엇인가. 

이제 푸름을 한껏 자랑하던 산속의 모든 나무들과 숲들도 서서히 황금빛으로 변해 버릴 것이고 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들만이 이 황량한 산속에서 외롭게 버텨 서 있을 것이다. 나무는 때가 되면 버리고 비운다. 우리 인간들도 욕망, 재물, 명예 모든 것을 세월 앞에 전부 내놓고 떠나고 만다. 이제 남은 인생 지금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이 소나무처럼 고단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힘이 돼주는 삶을 살순 없을까? 후드득 후드득 비가 아까보다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를 맞으며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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