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은 ‘씨받이’(1986)와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국내 여배우 최초로 ‘월드스타’라는 호칭을 얻었다. ‘칸의 여왕’이라 불리는 전도연은 ‘밀양’(2007)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14년 국내 배우 최초로 칸영화제 심사위원까지 맡는 영예를 누렸다. 

거론된 두 명의 배우 외에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는 활동 시기와 영향력에 따라 다양하다. 그 중 이 여배우를 빼놓고 우리 영화를 논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할 것이다. 데뷔와 동시에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고, 연기인생 40년 동안 국내외에서 24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대배우 ‘윤정희’다. 무려 300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 준 그는 특정 장르나 캐릭터에 고정되지 않았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외모로도 주목받아 1960∼70년대 원조 트로이카의 한 축을 담당한 그녀는 대중영화와 예술영화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낸 독보적인 배우라 하겠다. 그 중 1977년 개봉한 ‘야행’은 여성의 시각에서 시대의 신경증을 감각적으로 드러낸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짜인 틀에 맞춰 묵묵히 일하는 평범한 직원 미스 리는 최근 직장 내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자신과 함께 노처녀의 대명사로 통하던 동료가 결혼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노처녀는 혼자 남았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스 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미스 리는 사무실 박 대리와 몇 년째 비밀연애 중이다. 결혼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남자 때문에 몇 년째 동거 중인 현 상태가 여자는 답답하기만 하다. 매일 같이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박 대리는 미스 리의 감정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갑갑하고 공허한 일상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휴가를 내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영화는 방황하는 여성의 행적을 쫓는다.

휴가 동안 일탈에 몸을 맡긴 그녀는 처음 보는 남자를 과감하게 유혹하는가 하면, 술에 취해 의미 없는 추파를 던지는 남성들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밤거리에서 끈적한 시선을 받는다. 일탈을 통해 미스 리는 가슴 깊이 묻어둔 강렬한 감정의 빗장을 풀고 자신의 억눌린 욕망을 분출하려 애쓴다.

‘야행’은 1970년대 영화로는 드물게 여성을 주체적인 인격체로 표현한 작품으로, 비정상적으로 억눌린 인간의 욕망을 여성의 입장에서 과감하고 파격적으로 그렸다. 주인공의 다층적인 심리와 내적 갈등은 대사보다 배우의 눈빛과 신체 언어로 강화되는데, 이는 배우 윤정희의 입체적이고 대담한 연기를 통해 완성됐다. 이 외에도 베트남전쟁의 상처, 당시 사회의 결혼관, 술기운을 빌려야 겨우 활기를 되찾는 소시민들의 부유하는 모습 등으로 1970년대 한국사회의 여러 징후를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50여 군데가 검열로 잘려 나가 확실한 맥락을 파악하긴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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