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요즘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선생님’이란 호칭이 보편화돼 있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은 당연히 ‘선생님’이라 불리지만 일반인에게 ‘선생님’ 호칭을 붙이기는 아직도 어색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글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을 선생(先生)이라 일컫는다면 나이가 든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또한 사장님이란 호칭처럼 이것도 따지고 보면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런데 이보다는 이미 자연스럽게 호칭으로 일반화된 것이 ‘선생’이다. 이 짧은 말은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스승과 같은 인물에게 쓰인다. 여기서 ‘선생님’과 ‘선생’이란 호칭이 주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보고자 한다.

서양에서는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곤 한다. 우리 정서로는 매우 무례한 금기 사항이다. 서양 언어에도 존댓말과 높임 표현이 있지만 우리말의 다양하고 섬세한 어법에 비할 수는 없다. ‘…해라’부터 ‘…하시옵소서’까지 갖가지 상황에 적용되는 다채로운 어미 활용은 우리 언어의 장점이다. 

그런데 막상 연장자를 부르는 호칭에서는 그러한 다양성의 폭이 줄어든다. 집안에서의 촌수나 사회생활 직함을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 마땅치 않다. 

흔하게 쓰는 ‘아무개 씨’는 좀 무례해 보인다. 그래서 ‘아무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부쩍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문제는 TV 등에서 나이 든 연예인을 대우한다고 ‘아무개 선생님’으로 부르는 걸 보면 솔직히 낯간지럽다. 여기엔 해당자가 살아온 이력이나 행실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경우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주는 거북함은 더욱 커진다.

그렇다면 별로 공감을 얻지 못하는 ‘아무개 선생님’ 호칭보다는 ‘아무개 선생’으로 불리는 경우를 보자. 이때는 사회의 사표(師表)가 되는 인물이 떠오른다. 예컨대 퇴계 선생, 율곡 선생, 허준 선생,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 장준하 선생 등등이 그렇다. 이런 분들께 붙이는 ‘선생’ 호칭은 별다른 생각 없이 붙여주는 ‘선생님’보다 그 자체로 더없는 존경과 흠모의 표현이다. 왜냐면 이런 분들은 공통적으로 걸출한 사상과 업적, 고결한 인품으로 후세의 칭송을 받기 때문이다. 결코 고관대작을 지내면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도모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름 다음에 ‘선생’ 두 글자가 합쳐져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됐다.

필자는 모든 이에게 학교와 사회에서 불리는 호칭인 ‘선생님’과 ‘선생’에 대해 그에 합당한 어른인지 성찰해 보기를 제안한다. 학교에선 학생 이외 대부분의 어른이 저절로 선생님으로 불린다. 이에 학생들이 부르는 호칭인 ‘아무개 선생님’이란 말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 호칭에 합당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며 또한 인간 됨됨이를 갖추고 있는 어른인지를 성찰해 보는 것이 먼저다. 

교사는 제2의 부모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 말이 무색하게 부끄러운 교사들이 각종 매스컴을 타고 있다. 단지 직장인으로 감동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록 소수지만 그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편협하며 아집을 부리면서 살아간다. 진정한 선생님일 수 없다. 

그럼 사회는 어떤가? 안타깝게도 ‘아무개 선생’을 찾기 힘든 세상이 됐다. 어지러운 사회를 향한 외침, 고결한 언행으로 깨우침을 주는 ‘아무개 선생’이 그리운 시대다. 한때 올곧아 보였던 처신에다 외길 삶으로 정진한 인물로 인정받아 혼탁한 세상에 스승이 되겠거니 기대를 모았던 사람도 정치권에 입문해 이런저런 추문에 휩싸여 사라지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그래서 필자는 일상 속에서 평범한 시민, 성실하고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끼리, 비록 세상의 사표가 되는 분께 붙이는 존경의 호칭은 아니더라도, 서로를 ‘아무개 선생’으로 부르며 살아가자고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이 시대에 진정한 ‘선생님’과 ‘선생’이 사라져감을 보완하면서 각자 삶의 경륜과 일상의 아름다움, 소박한 지혜를 공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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