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어느 월간지에서 본 짧은 글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영국에서 ‘어린아이가 놀다가 다쳤을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달려갈까?’라는 질문과 답에 관한 글입니다. 예시된 사람은 ‘밥을 먹여준 사람’, ‘야단친 사람’, ‘놀아준 사람’, ‘공부를 가르쳐준 사람’, 그리고 ‘힘들 때 다독여준 사람’이었는데, 아이들은 ‘놀아준 사람’과 ‘힘들 때 다독여준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예시된 다섯 사람을 부모라고 상상해보면 다섯 개의 역할은 곧 부모 역할이 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만을 들어주면 아이는 조화롭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공부도 시켜야 하고 밥도 먹여야 하고 또 꾸중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게 하는 지혜도 이 예화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먼저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가 바탕이 돼야 아이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기꺼이 해나갈 겁니다. 이렇게 서로 ‘신뢰’가 있을 때 건강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8개월째 코로나19로 인해 온 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고, 태풍에, 파업에, 데모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해서’라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정작 국민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국회가 열렸지만, 뉴스만 틀면 서로 언성을 높이고 서로를 비하하고 비난하는 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수재민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문을 닫는 소상공인들의 한숨 소리는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남 탓’을 하며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일이 왜 이리도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것도 힘 있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서로를 불신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아이가 원하는 것, 즉 함께 놀아주고 다독여주는 것이 먼저 필요하듯이, 지금 국민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통이 제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소통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상대의 기준에서 상대를 헤아리는 ‘역지사지’하는 태도입니다. 「유머와 화술」(이득형 지음)에 프랑스의 카르노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파리의 어느 부자가 초청한 연회에서 겪은 일화가 나옵니다. 대통령이 앉아야 할 자리는 당연히 가장 중요한 자리일 텐데, 어쩐 일인지 그 자리는 철도회사의 기사가, 다음 자리는 유명한 문학가가, 그 다음 자리는 화학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당황하고 화가 난 수행원이 부자에게 항의하자 "좌석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순서로 정했다"라고 하면서 부자는 이렇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물론 대통령이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하시지요. 그러나 제가 방금 말씀드린 위대한 사람이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정한 순서입니다. 대통령께는 이 좌석 배치가 대단히 죄송하고 결례가 됐을 겁니다. 그러나 대통령 자리는 각하께서 물러나시더라도 누군가가 대신할 수 있는 직위입니다. 그러나 저기 앉은 기사는 세계 어디에도 한 사람밖에 없는 기술자입니다. 저분이 저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를 대신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앉으신 문학가나 화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리는 제일 중요한 자리여야 한다’는 생각은 우월감에서 비롯된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은 ‘나는 늘 옳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갑질’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갑질하는 사람들은 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회는 분열이 생기고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용기 있는 정치가와 집단 대표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국민의 신음이 들리고 눈물이 보일 겁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나?’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고, 그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국민이 힘겹고 아플 때 그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갈 겁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