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유한준, 참다운 문학가로 오늘날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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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유한준, 참다운 문학가로 오늘날 재평가
세상 만물 포용하는 지식인의 길을 걷다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9.15
  • 2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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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로 권력이 서울 도성에 집중되면서 도시문화가 발달했다. 지배층은 서울 근교에 농장을 마련하고 별서와 선영을 경영했는데, 도성에서 가까운 남양주와 교하 등이 각광을 받았다.

 남양주시의 대표적 명산인 천마산과 묘적산의 경계인 차유령(車踰嶺, 현재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자락에 자리한 기계유씨(杞溪兪氏)도 이 같은 경우다.

 기계유씨는 유척기(兪拓基)·유언호(兪彦鎬)·유한준(兪漢雋)등 조선 후기 걸출한 관료 학자와 뛰어난 문인을 다수 배출한 명문가다. 특히 유한준은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문단의 쌍벽으로 일찍 학계에 주목받았다.

 유한준은 16세 때 당대 문명을 떨쳤던 김이곤(金履坤)에게 시를 배우고, 남유용(南有容)에게 문장을 배웠다. 1768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김포군수, 형주 주부(主簿), 군위 현감, 해주 판관 등을 역임했다.

 노론계 학자면서도 당색에 얽매이지 않고 남인, 소론 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했다. 당대 성리학자들이 이단으로 배척하던 노자와 장자, 불교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박지원은 유한준의 글을 보고 논리가 분명하고 바르다고 해도 증거가 없다면 이길 수 없고, 글 짓는 사람은 경전을 잘 인용해서 자기의 뜻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박지원, 「답창애」 참조). 이에 유한준은 옛것을 모방하기를 좋아하는 의고주의자(擬古主義者)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근래 들어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만경대’에 쓴 유한준의 친필 시고.
‘만경대’에 쓴 유한준의 친필 시고.

#‘참 문학가’를 꿈꾸다 

조선은 사대부가 도학(道學)보다 문인(文人)으로 사는 것에 부정적인 분위기였다. 

유한준은 음식 좋아하듯 문학을 좋아하는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처럼 세상 모든 책을 읽고 조선의 모든 사람을 기록하겠다고 목표를 세울 정도로 문학도로 살기를 원했다. 

스스로 자기 삶을 기록한 ‘저수자명(著수自銘)’에서 회고하면서, ‘자신은 처음 문장이 서툴렀을 때, 진나라 한나라의 고문만을 숭상하여 장자, 굴원, 사마천, 한유 등을 섭렵했으나 이후 50여 년간 마침내 얻은 것은 없었다’고 했을 만큼 생애 전반을 문학가로 자처하며 살았다.

유한준은 당대 문명이 높았던 박지원과 박윤원(朴胤源)과 교유가 깊었다. 박윤원은 문장 규칙에 딱 맞게 고문을 잘 지었고, 박지원은 재능이 뛰어나 규칙을 파괴하고 해학을 갖춰 문장이 경지에 올랐다고 인정하며, 품격 있고 걸출한 두 사람과 젊은 시절부터 교유한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박사능 문집」의 서문 참조).

유한준은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취향을 존중하며, 개개인의 독자적 이념과 문학을 긍정했다. 모든 사람마다 각자의 도(道)가 있고, 모두 자기만의 도를 완성하는 것이 좋은 문장을 짓는 사람의 공통점이라 여겼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도(恒道:불변하는 도)를 고집하는 것은 문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유한준은 내외를 구분하지 않고, 고아하거나 속됨을 따지지 않으며, 누구나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자기에게 충실하여 사물과 세계를 판단하는 것을 중시했다.

병사, 농부, 의원, 점쟁이, 나무꾼, 도공과 대장장이 등 모두 자기만의 감성과 경험을 토대로 개인적 감성을 표출하는 것을 참 문학이라 강조했다. 이는 문학을 도덕의 부수적 수단으로 생각하는 전통적인 성리학적 문학관을 극복한 주장이다. 그의 문학관은 문결(文訣:‘문학의 요체’란 의미) 등에 집약됐다.

저암 유한준의 초상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소장.
저암 유한준의 초상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소장.

#세상의 부조리함에 눈감지 않다.

유한준은 성리학적 명분에 사로잡힌 구태의 사고방식을 싫어했고, 부당한 현실 차별에 비판적이었다. 뭇 새들에 비해 봉황새가, 뭇 짐승들보다 신성한 동물인 기린이 지위가 높다고 당시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지만, 날개 달린 새와 네 발 달린 짐승이란 관점에서 높고 보면 지위의 고하를 구별할 수 없다며, 당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행해지는 차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창하종국기」참조).

또 신분이 낮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깊이 이해했으며, 모두가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사대부에 비판을 가하고 신분이나 지위,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 존중의 사고를 주문했다.

이는 관리로써 자기 역할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1777년(정조 1) 유한준은 경상도 군위(軍威: 羅山, 赤羅) 현감으로 나갔다.

"수령은 (백성을)살피지 않고, 감사는 구휼(救恤)하지 않으며, 조정은 논의하지 않으니, 임금은 알지 못하고 백성은 병들고 지쳐서 입과 배를 채울 겨를 없으니 예의를 어찌 돌보겠으며, 예의가 없으니 어찌 순수함이 있겠는가?"라며 관리들의 직무유기를 비판했다.

백성들이 곡식을 해마다 반환해도 쥐새끼처럼 곡식을 훔치고, 마을사람에게서 고혈(膏血)을 쥐어 짜내고, 그 친족들까지 착취하는 아전들의 횡포도 고발했다(「나산책」 참조).

유한준은 문서위조, 뇌물 수수 등이 자행되는 세태를 보면서 "진실로 기댈 곳이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을 먹이지 않고, 참으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도리어 다른 사람을 먹는다"라며 가진자의 탐악 속에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다.

조선후기는 도시문화가 발생하고 상품경제가 발달한 시기였다. 중인계층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기층민의 문화가 성장했다. 당시 일반 사대부들이 비루하고 속되다는 이유로 백성들의 일상을 문학과 예술의 주제로 선택하지 않은 것과 달리, 유한준은 일반 백성들의 입에서 전하는 속담과 민요를 한역(漢譯)해 자신의 문학으로 끌어들였다. 언기(諺記)와 언총(諺叢) 등이 바로 그것이다.

유한준은 속담과 민요가 속되기는 하지만 정신이 흐르고 촌스럽지만 생동하며, 인정과 사물의 사정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기층의 문화를 수용했다(「언기」의 서문 참조). 민초들의 언어와 그 일상에 주목하는 것을 사대부인 자신의 소임, 문학의 중심 주제의식으로 삼은 것이다. 

유한준은 기층민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문예와 서화를 좋아하고 인품도 훌륭하지만 신분이 낮은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신사보(申思輔)라는 여항인을 비롯해, 진정 그림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알았던 여항화가 김광국(金光國), 서출이어서 출세를 포기하고 세상을 떠돌며 시작(詩作)으로 울분을 달랜 남유형(南有衡), 전염병을 잘 고치는 의사 홍익만(洪翼曼) 등 낮은 신분의 전문가 그룹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데 힘썼다. 특히 임윤지당(任允摯堂)처럼 여성의 문학을 주목하지 않던 시대에 여성의 문학적 성과에도 주목했다.

유한준의 죽서루 암각문.  <기계유씨 대종회 부운장학회 제공>
유한준의 죽서루 암각문. <기계유씨 대종회 부운장학회 제공>

유한준은 인성과 능력을 중심으로 사람을 뽑았던 과거와 달리 가문의 지위로 인물의 경중을 판단하는 세태를 맹비난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과 주변인으로 살다간 인물들에 눈을 둔 이유기도 하다. 가문이나 신분 따위가 아니라 능력과 덕성을 갖추고 독실한 실천을 사회지도층의 자세로 강조했다.

유언호(兪彦鎬)는 유한준에 대해 ‘매우 깊이 있고 독자적인 경지에 올랐다’라고 했고, 성대중은 ‘금세의 거장’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오재순(吳載純)은 ‘옛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경지에 올라 당세에서 최고이다’라고 했다. 참다운 문학가에게 걸맞는 평가다. 

코로나19와 혼란스러운 국제정세로 국민들의 삶이 혼돈 그 자체인 현대를 바라보며 유한준을 떠올려 본다. 중책에 올라 국민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자리에 있다면, 스스로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또 속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만 하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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