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에 따라 인간도 얼마든지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 세계 유수의 석학들이 철학적 메시지를 담아 분류 기준을 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아도취에 빠진 이들이 가벼운 농담의 영역에서 이분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저항하는 자’와 ‘순응하는 자’라는 분류법은 듣는 이로 하여금 사유의 강에 풍덩 빠지게 한다. 삼각형 모양의 비닐 포장지에 들어 있는 모 회사 유제품을 놓고선 세상에는 ‘빨대를 꽂을 수 있는 자와 꽂지 못하는 자’로 나뉜다고 너스레를 떠는 경우는 유머의 차원이다. 증세가 심각해지면 세상 사람을 자신을 좋아한 사람과 좋아할 사람으로 가르기도 한다.

기자가 아는 어떤 분은 독창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잣대를 내놓았다. 일이 되는 게 목표인 사람과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목표인 사람으로 갈린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장착하고 범위를 좁혀 정계와 관료사회를 바라보면 색깔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일이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데 온 동네일에 참견(?)하는 이가 눈에 띈다. 바지런하다는 칭찬도 늘 따라 붙는다. 그의 시야에 언제나 ‘윗분’이 들어온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자신이 가만히 있어야 일이 되는데도 굳이 나서서 대중을 향해 메가폰을 잡는 정치인도 있다. 소신과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솔깃한 얘기들을 마구 쏟아낸다. 대중은 열광하지만 일은 그르친다. 일반 시민사회에서도 누가 ‘안다니’ 아니랄까봐 온갖 세상사에 조언이랍시고 늘어놓는 이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재밌다. 일이 꼬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내뱉는다. 바로 ‘것∼봐(라)’다. ‘그것봐(라) 내가 뭐랬어’의 줄임말이다. 이들이 신봉하는 ‘사상’을 이름하며 ‘것봐라이즘’(Geotbwaraism)이라고 한다. ‘것봐라이즘’ 신봉자들을 ‘것봐라이스트’(Geotbwaraist)라고 부른다.

‘것봐라이즘’은 쇠몽둥이보다 무서운 둔기다. 실패를 먹고 사는 ‘이념’이어서다. 일이 되건 말건 안중에도 없다. 적절한 타이밍에 젠체하며 ‘것∼봐(라)’를 외치면 그만이다. 주변에 ‘것봐라이즘’을 설파하는 이가 있다면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코로나19보다 무서운 전염성을 지녔다. 인간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갉아먹고 인간관계와 조직마저 와해시키는 악성 바이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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