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군장리의 청백리, 팔곡 구사맹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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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군장리의 청백리, 팔곡 구사맹 〔完〕
평생 문한에 뜻 두고 지위고하 막론 성의로 사람 대하다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9.29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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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사냥을 나와 푸르고 아름다움에 놀라 새로운 나라의 미래와 포부를 빌었던 남양주의 명산 천마산(天摩山). 이 산은 하늘에 걸려 있을 만큼 높다고 해서 ‘천괘산(天掛山)’이라 불리는데(이식, 「영언당기」 참조), 서쪽으로 능선이 뻗어 군장리(群場里, 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이르러 팔곡산(八谷山)이 된다.

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울창했던 팔곡산엔 구수영(具壽永) 등 능성구씨(綾城具氏) 6대가 잠들어 있다. 능성구씨 묘역은 조선의 3대 기인(奇人)인 북창(北窓) 정렴(鄭렴)이 가문에 훌륭한 후손이 많아 가문이 잘 될 것이라며 잡아준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능성구씨는 구사안(具思顔), 구사맹(具思孟), 청안 현감(淸安縣監)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 죽은 구사민(具思閔)형제가 나면서 조선의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구사안(具思顔)은 중종의 셋째 딸 효순 공주와 혼인했고, 구사맹은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버지다. 

구사맹은 왕실의 외척이자 공신으로 호화로운 삶을 보장받았지만 심부름할 노복도 두지 않고 따로 집을 장만하지도 않았을 만큼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부인 신씨는 오직 남편의 월급만으로 살림을 해야 했는데, 남편의 의복부터 집안의 대소사를 부인이 길쌈을 해서 마련할 정도였다. 부인 신씨는 신립(申砬) 장군의 누나이기도 하다.

구사맹의 딸인 인헌왕후 역시 평생 비단을 걸치지 않았다고 하니 집안의 내력을 보는 듯하다. 

남양주 금곡동 팔곡산 자락에 위치한 능성구씨묘역.
남양주 금곡동 팔곡산 자락에 위치한 능성구씨묘역.

# 담박하고 검소한 인물로 신망받다

 ‘팔곡(八谷) 선생’으로 불린 구사맹은 간결하고 조용한 성품을 타고났다. 1558년(명종 13) 28세 나이로 과거 급제한 이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황해도관찰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당시엔 이조정랑,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63년과 1576년엔 명나라에 외교사절로 다녀오기도 했다.

 구사맹이 살던 명종·선조 연간은 중종반정 이후 등장한 사림(士林)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정치의 중심에 있던 시대이자 사림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분당하고 4색 당파가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정철 등 사림파 원로들과 류성룡(柳成龍) 등 젊은 사림들 간의 비판과 갈등이 첨예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구사맹은 석유(碩儒, 원로 어른)로 존경받았다. 사람들을 인자함으로 대하고 권세가에 아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식, 「택당집」 참조). 

 구사맹은 스스로 ‘정부 요직에 있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고 비록 높은 지위에 있지만 영화와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했고(유근, 「서경문집(西坰文集)」 참조), 이를 확고하게 지켰다. 

 ‘구사맹은 천성이 담박 조용하며 검소한 것을 편안히 여겨 토지나 가옥 등을 장만하지 않고 오직 문한(文翰)을 즐긴 사람’이란 역사의 평가(「선조실록」, ‘선조 37년 4월’ 기사 참조)와 1630년(인조 8)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諡號)가 이를 뒷받침한다.

구사맹이 중국으로 사신을 떠나는 월사 이정구에게 보낸 전별시.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 ‘난후조망록의 서문’ 구일과 이단하가 간행하고 이단하가 발문을 지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구사맹이 중국으로 사신을 떠나는 월사 이정구에게 보낸 전별시.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 ‘난후조망록의 서문’ 구일과 이단하가 간행하고 이단하가 발문을 지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권위보다는 성의와 신실로 사람들을 이끌다 

 구사맹은 관료로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자각했다. 관료는 좋은 평가를 듣는 것도, 논쟁으로 의리를 밝히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업무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구사맹은 남양부사(南陽府使) 시절 목장 관리에 문제가 발생하자 감목관(監牧官)을 설치해서 치밀하게 관리하고 제도화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백성의 목숨을 구할 계책을 수립하고 지방민을 잘 보호했던 지방관이었다(「덕계집」, ‘송구사맹관찰황해(送具思孟觀察黃海)’ 참조).

 인사 담당인 이조(吏曹)에 근무할 때는 편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모으고, 업무에 대해 공손하면서 정밀하게 일했다. 또한 전란의 와중에도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유생들을 자주 시험하고 포상하는 등 학교교육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인조실록」, ‘인조 10년 2월 3일자 기사’ 참조).

 군현을 다스리는 관찰사는 강한 책임성이 요구된다. 당시 세간에는 ‘관찰사는 자기의 부하 관리들에게 위엄으로 대하려 한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소속 관리들의 부족한 부분을 일깨워 주지 못하고 권위로만 아랫사람을 제압하려는 최고 지방관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구사맹은 지위 고하,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를 정성을 다해 후하게 대접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오만함이 없었고, 한때 그를 업신여겼던 인물들도 모두 그를 흠모했다.

 구사맹의 지기(知己)인 당대 최고 문장가 최립이 요구했던 관찰사의 미덕(최립, 「송호남구감사서(送湖南具監司序)」 참조), 즉 아랫사람이 부족한 면이 있으면 문책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도록 유도하며, 나보다 나은 식견과 스스럼없이 아랫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관찰사의 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남양주 금곡동 팔곡산 자락에 위치한 능성구씨묘역.
남양주 금곡동 팔곡산 자락에 위치한 능성구씨묘역.

# 전란의 고통을 「난후조망록(亂後弔亡錄)」으로 남기다

 구사맹은 우리 문학사와 전쟁사에 중요한 명작을 남겼다.

 그는 전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땅을 짓밟고 조선 사람을 살상한 일본을 ‘만세의 적’으로 규정했다. 명나라에 대해서도 일본과 강화를 맺고자 하는 행태 등을 본 뒤 명나라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키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전란 속에서 장수와 의인 등 수많은 죽음을 직접 보고 들었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난후조망록」이다.

 구사맹의 「조망록」은 임진왜란 당시 국가와 지방 풍속에 공이 있거나 모범을 보인 사람들을 선발, 그 대강을 약술하고 그들의 모범적인 면모를 시로 지어 엮은 것이다.

 「난후조망록」은 사절(死節)·역전(力戰)·창의(倡義) 등 17개 분야로 나눠 국가에 공이 있거나 모범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을 채록했다.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 남자 78명, 부녀자 8명 등 모두 86명이다. 

 그의 저서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처참하게 죽은 백성들을 애도한 「강도조망록(江都弔亡錄)」에도 영향을 줬다.

 이단하(李端夏)는 ‘충성스럽고 어질며 절의가 있는, 세상에 전해져 사람들이 감동하며 암송하는 작품’으로 평가했다.(이단하, 「팔곡조망록발」 참조)

 구사맹이 죽자 평생 제자가 돼 문하에 들고 싶어 했던 유몽인(柳夢寅)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 세상의 지기를 잃어 내가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유몽인, 「어우집」 참조).

 동방급제(同榜及第)해 함께 선조를 호종하며 정사를 돌봤던 윤근수(尹根壽)는 자기 주변에는 속된 사람만 있고 지기가 없다며 눈물을 떨궜다.(윤근수, ‘만구이상사맹(挽具二相思孟)’ 참조)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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