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현재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인문학 열풍이 가시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인문학 열풍 속에서 삶의 활력과 사색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대신에 우리 삶은 오히려 비(非)인문학적 환경으로 내몰리고 있어 안타깝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각종 매체에서 그리고 정치권은 매일 같이 대국민 말을 쏟아내지만 거칠기가 성난 황소 같고, 타인에 대한 칭찬이 사라진 인색함과, 무조건 비판하고 빈정대고 무시하는 심판장 같다. 과연 이것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회가 맞는지 아이러니하다. 차라리 인문학 탐색을 무시하거나 나 몰라라 하는 분위기라면 기대치를 접거나 참고 넘어갈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인문학 탐구를 행동으로 연계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문화의 시대가 찾아왔었다. 그래서 온 세상에 문화라는 말이 섞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금은 또 인문학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는 것처럼 과대포장돼 있다. 원래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인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정작 인문학이 활성화돼야 할 대표적인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침체되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지구촌에 불고 있는 인문학은 전통적인 의미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외 계층을 위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가 있다.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하게 된 동기를 이해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미국의 중범죄자 수용 교도소인 베드포드힐스는 가정 폭력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8년을 보낸 비니스 워커라는 재소자가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왜 가난한 것 같나요?"라는 질문에 바로 이 클레멘트 코스에 대한 영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 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얼 쇼리스의 인문학은 이처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용어에 혼란이 생겨 인문학과 문화의 차이가 없고 인문학이 곧 예술인 양 간주되기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인문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홍규 교수는 「문학의 거짓말」에서 타락한 인문학, 빈곤한 인문학을 지적하면서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위해서이고, 인문학을 자유-자치-자연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이는 현재까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인문학의 유행에 대한 성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얼 쇼리스의 「문학은 자유다」의 한국어판 추천사에서 강영안 교수는 인문학 강좌가 강의 중심인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강의만 듣고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문학적 지식의 소유는 오히려 사람을 더욱 오만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인문학 강좌에 소크라테스적 방법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생각하고 토의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글로 담아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럼 학교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이 역사와 철학을 배우고 문학을 읽으며, 예술을 접하는 까닭은 세상을 사람 사는 공동체로 가꾸기 위해서다. 따라서 인문학이 강의 중심에서 벗어나야 하고, 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아는 것을 행동하는 교육으로 전환돼야 한다. 그래서 ‘나의 인문학 실천’이란 작은 규정을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교사, 학생 누구든 인문학적 지식을 학교에서 실천하게 될 것이다. 행동 없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님을 교육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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