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연극, 음악, 무용, 회화와 같은 예술은 언제, 누가 탄생시켰는지 그 시작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인류 등장과 함께 주술적이고 제의적이며 유희적 차원의 표현이 점차 그 모습을 갖춰 나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영화는 그 기원이 명확한 예술이다. 카메라 등장 이후 대중에게 소개된 영화는 19세기 후반인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다수의 관객에게 선보인 작품을 최초로 삼는다. 

사실 뤼미에르 이전에도 영상을 공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최초라는 타이틀이 이들에게 돌아간 까닭은 공공장소에서 대중에게 유료 상영한 첫 시도라는 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완성은 관객까지 포함한 개념이라 하겠다. 이때 아깝게 최초가 되지 못한 유명 인사로는 토마스 에디슨이 있다. 발명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촬영기와 재생기를 발명하고 영화 전용 스튜디오까지 건설해 뤼미에르 형제보다 앞서 왕성하게 활동한 에디슨이 선보인 영화는 작은 구멍을 통해 혼자 보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집단 관람과 개인 관람의 차이가 영화 기원의 분기점이 됐다. 탄생 초기 영화는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시류가 급변해 영화의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대열차 강도’(1903)가 그 흐름을 바꾼 작품이다.

무장 강도가 철도 전신국에 들어와 열차를 세우라고 명령한다. 전신 기사는 겁에 질려 시키는 대로 하지만 이내 강도단은 그를 기절시킨 후 결박하고 달아난다. 재빨리 열차에 올라탄 강도단은 돈과 귀중품을 모두 약탈한다. 같은 시각, 정신을 차린 전신 기사는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꽁꽁 묶여 있어 쉽지 않다. 때마침 아버지를 방문한 딸 덕분에 결박에서 풀려난 기사는 파티를 즐기던 민병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지체 없이 민병대가 추적에 나서고 곧바로 강도단을 따라잡는다. 몇 발의 총성이 울린 후 민병대의 승리로 악은 처단된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던 영화는 강도단 두목이 관객을 향해 총을 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간단한 스토리라인의 영화 ‘대열차 강도’는 에디슨 영화사에서 일하던 촬영감독 출신의 에드윈 포터가 연출한 작품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몇 년간 여러 도시를 순회 상영할 만큼 높은 인기를 보였던 이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최초를 달성했다. 특히 초기 영화가 벗어나지 못하던 연극과 유사한 무대극 특징에서 탈피하는데, 세트와 로케이션의 적절한 활용과 카메라 움직임으로 영화만의 장점이 부각됐다. 또한 추격신의 교과서인 두 시공간을 번갈아 가며 보여 주는 교차편집도 처음 등장한다. 이로써 이 작품은 극영화 형식의 시초가 된다. ‘대열차 강도’의 높은 인기로 미국에서는 1900년대 초 상업 엔터테인먼트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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