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준칙의 존재 이유는 재정수지, 정부지출, 국가채무 같은 재정지표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치를 설정, 방만한 재정집행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래야 적자 국채 발행 가능성을 감소시켜 국가를 파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정부가 마련한 재정준칙 도입 방안은 이러한 목적과 동떨어져 있다.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60% 이내에서, 통합재정수지는 GDP의 -3% 이내에서 관리하기로 했다. 이것도 동시에 충족할 필요가 없다. 어느 한쪽의 지표가 기준치를 초과해도 다른 한쪽이 기준치보다 낮으면 재정준칙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는 이상한 셈법을 내놨다. 

이뿐만이 아니다.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적용에 예외를 둘 수 있다는 셀프 배려 조항까지 추가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아무리 다르다 해도 이 정도로 돌변할 줄 몰랐다. 2015년 당시 야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재정건전성의 국가채무 마지노선을 40%로 규정하며, 박근혜 정부의 재정 상태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듬해 기획재정부도 국가채무비율을 GDP 대비 45% 이내, (통합재정수지가 아닌) 관리재정수지를 GDP의 -3% 이내에서 관리하는 방안의 재정건전화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그때 그랬던 (지금의 당정청) 인사들이 국가채무비율 60%를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이라며 내놓은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재정준칙의 최초 적용 시점도 2025년으로 미뤄놓았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60%로 정했고, 왜 차기 정부에서 시행될 것을 굳이 만들어 발표한 걸까. 의도는 짐작 가능하다. 정부는 계속해서 국가채무를 늘려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다 보면 2025년이 도래할 때쯤 국가채무비율이 60%대에 근접할 텐데, 다음 정부는 잔여 유예기간(2년 9개월) 동안 상황을 잘 수습해서 더 이상 빚을 늘리지 말라는 것이다. 

재정준칙의 기본정신을 무력화하는 ‘방만 재정준칙’을 만든 이유가 이것이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현 정권은 마지막까지 빚을 내서 쓰겠다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재정준칙을 법제화하지 않는 편이 낫다. 다행히 이마저 싫다고 여당 내에서도 반대 분위기가 우세하다 하니 정부안은 휴지통으로 보내는 게 낫다. 대신 지금부터는 야당 의원 모두가 구국의 신념과 각오로 예산결산위원회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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