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에 유행한 ‘지영이 백(bag)’이라는 가방이 있다. 짙은 갈색 바탕에 루이비통 무늬로 채워진 이 백은 여성들의 워너비 아이템이 돼 짝퉁이 범람할 만큼 유행했다.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는 뜻에서 ‘지영이 백’으로 불렸는데, 여성 이름의 대명사가 ‘순희’나 ‘영희’에서 ‘지영’이로 옮겨 간 것이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그 이름이 대변해 주듯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법한, 특별하지 않은 삶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소설 출간 후 젠더 갈등을 야기할 만큼 논란이 됐고, 동명 영화 역시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 측으로 극명하게 갈려 화제가 됐다.

30대 중반의 전업주부 김지영은 독박 육아 중이다. 남편 대현이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만큼 지영은 집안일과 육아를 떠안았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지영도 소싯적에 꿈이 많았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문학을 전공한 그녀는졸업 후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기획팀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커리어를 쌓고 싶었지만 지영은 한 사람의 직장인이기에 앞서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야 했다. 결혼하면 퇴사할 사람이라는 꼬리표 속에 남성 동기와 같은 기회를 얻지 못하기 일쑤였다. 이런 불평등을 지영은 관행처럼 굳어진 편견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의 축복이라는 결혼과 임신으로 지영도 예외없이 퇴사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지영에게 우울한 병증으로 다가왔다. 가끔씩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경험을 하고 몇몇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 병증에 시달리지만 지영은 ‘괜찮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괜찮다고 하면 다 괜찮아질 것처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경력이 단절된 전업주부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이전 세대와는 달리 198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남녀 구분 없이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때문에 남성들과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학업 성취에 있어서도 당당히 경쟁할 만큼 높은 성과를 보여 줬다. 그러나 실전으로 마주한 사회는 달랐다.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벽이 높았다. 특히 결혼과 출산이 맞물리면 부모의 역할보다는 엄마의 역할로 육아가 통합되면서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사회의 불평등을 비추고 있다. 남녀를 편 가르듯 나눠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분 짓기보다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부조리한 인식과 시스템을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화 속 지영은 ‘괜찮다’는 되뇌임처럼 모든 상황이 호전되며 끝난다. 마음의 우울과 정신적 병증은 적극적인 치료와 주변의 도움으로 나아진다. 하지만 우리 주변은 어떨까? 이 영화로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를 느꼈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함께 행복할 길을 찾아야 한다. 인식의 변화가 달라진 미래를 앞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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