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섬마을 선생님 연구회 운영위원
이영태 섬마을 선생님 연구회 운영위원

트로트 가수의 언택트 공연이 회자되고 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른 경륜 반백년을 감안하면 해당 가수를 가황(歌皇)으로 지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초등생들조차 ‘테스 형’을 운운하며 가황의 몸동작을 어쭙잖게 흉내 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기현상이라 칭할 만하다. 트로트는 인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랑, 이별, 항구 등이 노랫말에 등장해서가 아니라 인천권번 출신의 기생들이 유성기 음반 역사에서 또렷한 족적을 남긴 경우가 있기에 그렇다. 

예컨대 장일타홍과 이화자 등이 그들이다. 장일타홍(張一朶紅, 1910?∼?)과 관련해 그녀는 인천의 한 부요(富饒)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이 돌연이 병사(病死)해 가세가 기울어 겨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자매와 풍찬노숙을 했다고 한다. 이어 남은 가족을 위해 기생이 됐으나 설상가상으로 전차금으로 받은 것까지 사기를 당했고 이후 가무(歌舞)에 정진해 조선의 명창이 됐다고 한다(‘조선중앙일보’ 1934.9.11.). 활동 기간이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짧았지만 그녀는 유성기 음반을 10장(20곡)을 남겼을 정도로 해당 음반회사의 대표 가수였다. 대표 가요는 ‘첫사랑(유일 작사, 1934)’과 ‘옛님을 그리면서(김억 작사, 1934)’가 있다. 

ㅼㅓ나신 님이나 이즐길업고

못오신 님이나 생각하노라

님주신 애정을 어이할거나

첫사랑 든 것이 야속하지요.

  ‘첫사랑 (1934)’

‘떠나신 님이나 잊을 길 없다’ 하며 ‘밤이면 별 따라 눈물 흘리는’ 모습은 기생 화자의 정서와 다름 아니다. 장일타홍이 인천권번 출신인 것을 염두에 두면, 위의 노래는 그녀의 과거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첫사랑’의 작사가 유일(劉一, 1909~?)은 본명이 전기현(全基玹)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으로 이주해 성장했고,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인천부청(府廳)에 근무하다가 여러 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화자(본명, 순재 順栽, 1918~1953)는 신민요, 잡가, 유행가를 부르던 인천권번 출신의 가수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인천권번에서 활동하다가 가수로 진출했다(‘만선일보’ 1940. 7.31.). 그녀는 1936년 뉴코리아레코드사에서 데뷔해 포리돌레코드사와 오케레코드사에서도 활동했다. 그녀의 데뷔곡 ‘초립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전국의 레코드 상점 앞에 운집했을 정도로 그녀는 대중들에게 각광을 받던 가수였다. 

꽃다운 이팔 소년 울려도 보았으나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은 낙화(落花) 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화류춘몽 (1940)’

화자가 젊은 기생일 때에는 첫사랑에 울기도 하고 귀여움도 받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화자 자신이 밝히고 있듯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이기 때문이다.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라는 부분은 사랑의 실패 원인을 기생에서 찾는 데에 한정된 게 아니다. 기생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복합적인 심사도 담고 있는 진술이라는 것이다. 

한동안 인천권번 출신 가수들이 부른 노래의 정서가 한국 대중가요사의 한축을 이뤘다. 이른바 ‘사랑밖에 난 몰라’류에 해당하는 노래들이다. 노랫말 화자와 화자의 상대방이 상호 교감하는 내용이기보다는 사랑에 실패해 아파하는 화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가황이 들고 나온 신곡에는 ‘사랑밖에 난 몰라’류에 해당하는 듯하면서도 또 다른 류로 해석을 견인하는 노랫말이 있어 이것이 가황 현상의 또 다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는 공연 후 인터뷰에서 자신을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유행가 가수라 지칭했다. ‘유행’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가황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게 노래를 즐기는 한 방법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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