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순 인천문인협회 회원 수필가
정연순 인천문인협회 회원 수필가

무엇이나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그런 일이 그리 많지 않은데 자동차만큼은 충직한 신하다. 그것이 운전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동이 걸리는 소리나 엔진소리로 차의 컨디션을 짐작하거나 연료를 가득 채웠을 때 느끼는 만복감은 분신 같은 친밀감이라고 해도 좋겠다.  부드러움과 탄력과 안락함이 속도를 타고 온몸으로 전해오면 차와 한 몸이 되는 쾌감을 느낀다. 핸들을 잡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나름의 수칙을 고수함으로써 쾌감지수를 상승시킨다. 교통법규 엄수. 차선, 속도제한, 주정차 금지 등 법규는 다 나를 위한 것이다. 

양보 운전은 나를 여유 있고 너그럽게 한다. 얌체가 끼어들면 부모님이 위독하신가, 아내가 산통이 왔거니, 아이가 다쳤나 보다 한다. 위험하게 앞지르면 초보인가, 젊은인가, 영업차가 서둘면 ‘그래, 벌어먹어야지’ 한다. 공연히 차선을 이리저리 바꾸지 않는다. 칼치기 곡예를 해 보았자 별수 없다. 앞질러 가더니 나란히 신호를 기다리는 경우도 흔하지 않은가. 빨라야 얼마나 더 빠를까. 꼭 차선을 바꿔야 하는데 양보해 주지 않으면 야속하지만 주의를 집중해 때를 기다린다. 달리 방법이 없다. 품위를 지키지 않는 고급 승용차는 한심하다. 많이 누리면 그만큼 사회적 책임도 감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으스대기만 하는 꼴이라니. 끌끌. 

신호를 크게 믿지 않는다. 도심 네거리 바로 눈앞에서 난 충돌사고를 목격하고부터다. 신호대기 1번일 때는 신호가 바뀌어도 바로 출발하지 않는다. 이미 끝난 신호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차는 속력을 내기 마련이어서 큰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파란불이 켜져도 주위를 확인한다. 같은 이유로 신호 끝자락에 아슬아슬 꼴찌로 달려가지 않는다. 네거리의 사고는 대부분 급한 마음, 부주의가 원인이다. 신호는 바뀌기 마련, 위험한 꼴찌보다 안전한 선두가 낫다. 수신호에 의지하지 않는다. 몇 번을 비비적대더라도 내 감각대로 움직인다. 

처음 새 차를 갖고 사흘 된 날, 친절한 지인의 수신호만 보고 주차를 하다가 정면에 있는 소방관에 부딪혀서 범퍼가 언청이가 되고서 결심했다. 능숙하게 단번에 정렬 주차를 하면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전이 우선이니까. 앞뒤 범퍼에 자잘한 흠집을 내고 다니는 운전 사부에게 가끔 잘난 척을 한다. 차체는 은박지에 불과하다. 자동차 수리공장에 가본 적이 있다. 처참하게 중상을 입은 각종 차들이 비를 맞고 있었다. 전쟁터의 야전병원처럼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 섬뜩했다. 다쳤겠구나. 죽었겠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자동차라는 물건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졌다. 

사고가 나면 차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사고는 상대적이어서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지 않은가. 단지 내가 사고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길이 막히면 노래를 부른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삭제된 화면만 떠오르는데 희한하게 노래가 줄줄, 구성지게 잘도 넘어간다. 핸들에다 손가락 장단을 치며 고성방가. 어느새 길이 열린다. 옆 차 운전자를 의식할 필요는 없다. 나만 앞을 보면 그만이다. 요즘은 선팅이 진해서 완전 자유다. 

딱 한 번 차선위반을 했다. 토요일 오후 2시에 인사동에서 문단 행사가 있었다. 적어도 30분 전에 현장을 점검하고 진행을 의논해야 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극심한 정체였다. 날고 싶었다. 알리바바의 담요, 손오공도 부르다가 에라! 모르겠다. 비상등을 켜고 버스전용차선으로 달렸다. 범칙금 고지서가 왔다. 차량번호가 선명한 사진과 위치와 시각이 정확했다. 각오한 일이라 덤덤했다. 언젠가는 지공(地空) 겸용 차가 나오리라. 막히면 부웅 떠서 날아가리라. 얼마나 멋진가. 한강을 내려다보며 날아보리라.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운전이다. 날이 갈수록 차는 늘어나고 길은 복잡하고 사람들은 성급해져서 사고 위험은 커져 간다. 성호를 올리고 시동을 건다. 교만도 방심도 절대 금물, 그저 도로 위의 모든 이가 안전하기만을 바란다.

# 『수필문학』(1990) 등단. 『문학시대』(2009) 시 등단. 한국수필 문학상/황금찬시문학상 본상/ME문학상. 수필 「포공구덕」 중등교과서 수록/오늘의 한국대표수필100인에 선정 서울문화재단기금 일천만 원 수혜 수필집 『아무 일 없는 듯이』 출간 외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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