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인천시 동구 만석동과 작약도 지명이 일제의 잔재로 몰렸다. 섣부른 판정이었다. 만석동과 작약도에 관계된 문헌 자료들을 시기별로 간략하게 밝힌다. 인천의 정면에 자리하고 있는 만석동과 작약도 해역은 고대로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해양군사기지였다. 만석동 작약도, 월미도(동구 만석동 관할이었음), 영종도를 삼각 축으로 해서 수군 함대를 배치해 놓았던 해양 군사 요충지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해 신라와 중국 당나라의 교류를 막았던 해역이 경기 남양에서 작약도였다. 

만석동은 고려의 풍습이 이어져 왔던 마을이다. 만석동 선인들로부터 이어져 온 해양민속문화인 서해용궁제례의식이 있었다.

북한 개성에 있는 불교사찰 광명사 우물이 서해용궁 통로다. 고려 태조의 증조부가 서해용궁의 용왕 딸과 결혼한 후부터 서해용궁에 관한 풍습이 있어 왔던 것이다. 고려는 서해용궁의 용궁 종도 주조해왔다. 청동으로 주조한 고려서해 용궁 종이 일본에 보존돼 있다.

일본 코오슈우지역 삼정사, 세츠슈우지역 학만사, 카코군지역 주길사의 불교 사찰에 있다. 

만석동 서해용궁제례의식이 끊긴 이유는 일제 초기부터 압박이 있었다. 단기, 음력, 민속문화 등을 사용하지 못하게 말살하는 압력이 있었던 것이다.

자그마한 서해 용궁사당이 있었던 역사가 오래된 만석동 지명이다. 1866년부터 외국 함대와 상선들이 조선에 왔다. 대원군에게 조선의 개방을 요구하면서 정박하는 곳이 작약도였다. 그들의 교신문과 향해일지에 만석동 작약도가 명기돼 있다. 1882년 7월 임오의 난이 일어난다. 일본공사관이 서울시민들로부터 공격당했다. 일장기와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공사 하나후사와 일행들이 탈출에 나섰다. 인천까지 탈출한 일행들은 시민들에게도 공격당해 수명이 죽는다. 겨우 피신해 일본으로 탈출한 곳이 만석동 월미도였다.

1875년 8월 만석동 작약도 해역에서 일본함대 운양호 사건이 일어난다. 작약도 해역에서 영종도가 운양호 함대 공격을 받고 점령당하는 사건이었다. 1876년 우리 조정에서는 수신사 예조참의 김기수를 일본으로 파견 인천 만석동 작약도 해역에서 일어난 일본함대 운양호의 영종도 공격을 강력하게 항의하는 문서가 천황에게도 건네지고 사과문을 받아 오는 일도 있었다. 일본 천황과 정부 요인들도 인식하고 있었던 만석동 작약도 지명이다.

1886년 일본에서 대형 증기선 1척을 구입해 온다. 선박 이름을 해용호라 했다. 조선 최초의 관공선으로 사용하다 대한제국 제1호 함대 광제호로 바뀐다. 정박지를 만석동 해역으로 지정하고 운영됐다.

1893년 1월 대한제국 고종 임금은 인천 만석동 해역에서 모든 선박은 회선하라는 칙령을 발표한다. 만석포구로 곡물이 모이고 이것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일본에서는 조선쌀과 곡물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조선쌀과 곡물 소비가 늘어난다. 일본쌀보다 차지고 맛있는 조선 쌀밥에 일본인들은 매료돼 있었다. 우리 곡물 생산량에 비해 일본 반출이 늘어나자 곡물의 선박 적재를 금지하는 고종 임금의 칙령이 있었던 만석동 지명이다.

1897년 우리나라 최고의 학교 역사를 자랑하는 인천공립소학교(지금의 신흥초) 학생들이 만석동 넓은 들판으로 원정나와 종합운동회를 개최했다. 인천 체육의 발상지가 만석동이다. 여름철이면 학생들의 수영강습회가 열린 곳도 조선 최초의 해수욕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만석동묘도 해수욕장이었다. 만석동묘도는 일본에까지 알려져 있는 지명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인천지역 마을 지명을 변경하려고 조선통감부에 보고한 시기가 1907년 인천이사관시노부에 의해서다. 

그 이전부터 정치, 외교, 군사, 문화적으로 부침을 인천의 정면에서 마주하고 겪어온 역사가 오래된 지명 만석동, 작약도였던 것이다.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그들의 입맛대로 구획해 놓은 일본지계, 중국지계, 외국지계에도 속하지 않았던 유일하고 순수한 조선인 마을로 당당하게 있었던 만석동과 작약도 지명에 무슨 근거로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을 씌우려 드는 것인지 만석동 주민들과 함께 강력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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