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오늘날 우리는 무선통신(無線通信) 시대에 살고 있다. 무선통신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지점 사이에 전기 전도체의 연결 없이 정보를 전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전선(電線)없이 통신하는 방법이다. 조선시대 봉화와 같은 고전 통신방식도 무선통신이라 할 수 있겠으나 전신, 전화와 같은 유선통신에 대비되는 무선통신을 일컫는다. 그간 원거리 통신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였던 전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군함과 무역상품을 싣고 누비던 선박과 교신할 수 없다는 난점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1896년 마르코니에 의해 무선전신이 특허된 이후 열강에게 있어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야말로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었다. 

1900년 2월 일제는 부산의 절영도를 비롯해 인천, 원산 등 개항지와 연안의 주요 19개소에 무선전신국을 설치하고자 토지사용권 승인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무선전신의 편리함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설치할 계획임을 밝히고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일제의 거듭된 강압적 요구로 인해 1901년 12월 조선 정부는 결국 재정 부족으로 인해 무선전신을 설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에게 허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00년 10월 일제는 조선의 각 연안에 등대 건축을 요청했다. 개항장과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의 안전을 위한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우선적으로 출입이 잦은 일본 선박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또한 등대 건설은 연안 항해 시 황해를 통한 대륙 침략의 통로 확보라는 점에서 일본에게는 중요한 필수적 시설이다. 이에 조선 정부는 1902년 3월 인천 해관에 등대국을 신설했고 동년 5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팔미도와 소월미도 등대, 북장자서와 백암 등표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다음 해 1903년 6월 1일 점등을 개시했다. 

이후 무선전신 설치는 등대 건설과 함께 병행했을 것으로 보이나 무선전신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됐기에 등대 설치와는 달리 그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가 없다. 단지, 1907년 인천 월미도 무선전신소에서 일제와 전신을 주고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일본인들만이 독자적으로 이용한 무선시설이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성신문’ 1910년 6월 11일자에 의하면, 탁지부에서 무선전신을 설치하기 위해 예비금 3만 원을 지출했는데 그 대상지는 인천(월미도), 항문도(완도), 원산, 목포, 소청도 등지와 등대 순시선인 광제호(光濟號)이며 그 목적은 기상의 관측, 어업자와 연락, 경찰 사항, 난파선의 보고, 등대의 통신 등임을 보도하고 있다. 광제호는 조선이 최초로 새롭게 주문한 등대순시선 겸 군함이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이후 해군 군함으로서 기능을 상실해 연안 세관 감시선으로 이용됐고 ‘관용선’으로 줄곧 차출됐다. 광제호의 무선전신 설치는 이미 영국 미국 등에서 대양을 통행하는 모든 선박에게 반드시 무선전신기를 설치해야 한다는 법안과 무관하지 않다.    

무선전신 설치 공사는 1910년 7월께 마무리된 것으로 보이나 무선전신 개통은 한일합병(8월 29일) 후인 9월 5일에 거행됐다. 이때 무선전신 시설을 갖춘 광제호가 월미도에 설치된 등대 무선소로 첫 무선전파를 발사, 교신에 성공함으로써 민간에서도 무선통신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월미도 무선시설은 서해를 항행하는 대련항로의 중계국으로 사용됐고 기타 무선시설은 기상관측, 등대통신, 해안경비, 해난구조 등 특수 업무에 사용됐을 뿐 일반통신은 취급하지 않았다. 

110년 전 인천에서 시작된 무선통신의 진화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위성 통신, 디지털 통신, 컴퓨터 통신, 휴대전화 등으로 대변되는 정보통신 발달 여파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는 예측불허이다. 여기에 인천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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