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엄마가 몇 번이나 말했어?",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니?" 어린 시절, 수없이 들어온 말입니다. 분명히 말씀은 하셨는데 제가 제대로 알아듣지 않았거나 말씀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이 꽤 많습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개구리의 삶을 통해 가르침을 주는 라틴아메리카의 우화가 호세 페르난데스의 「똑똑한 바보」에 실려있습니다. 연못에 사는 개구리가 길가에 사는 개구리에게 충고합니다. "자네는 현명해서 수많은 위험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더군. 그런데 발에 밟혀 죽을지도 모르고 바퀴에 깔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서 사는 이유가 뭐니? 안전한 이 연못으로 와서 나와 함께 살면 어떻겠니?"

그러자 길가 개구리는 그를 비웃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는 길가가 위험하다는 건 말도 안 돼. 여기는 오랫동안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살던 곳이야. 그들도 아무 일 없이 잘 지냈어.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 곳을 바꾸겠니?"

연못 개구리는 "네 생각이 그렇다면 거기서 계속 살아.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해. 언젠가 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수레가 다가왔고, 수레는 길가 개구리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자는 이 우화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조언을 줍니다. "어설프게 똑똑한 사람은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남의 충고를 터무니없는 거라고 간주한다." 저자의 충고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젊었을 때는 제가 최고라고 착각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고민을 많이 했고, 누구보다도 노력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만큼 누구나 노력을 했고, 아니 오히려 더 많이 노력했었던 겁니다.

그때 그 시절의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고 교만했었는지를 세월이 한참 지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고약한 저를 품어줬던 당시의 선배님들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시련의 시기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친구들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겁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이 외롭다는 것이고, 그래서 친구로부터 위로받고 싶다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올라올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귀를 열고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뒤주 속의 성자들」(김윤덕 저)에 구두 수선가게 주인과 중년 손님이 나누는 대화가 나옵니다. 손님은 주인 노인에게 수선을 부탁하면서 어떻게 그 연세에도 일하냐고 묻자, 노인은 구두를 수선하면서 30분 동안이나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윽고 구두 수선이 모두 끝나 손님이 돈을 내려고 하자, 노인은 돈 받기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받지 않겠소. 당신은 내게 큰 즐거움을 선물했으니까요. 대부분 손님은 구두를 고치는 동안 내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늘어놓곤 하지요. 그것도 대부분 자신의 자랑거리만을 말이오. 그런데 선생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소." 말하는데 드는 에너지보다 경청하는데 드는 에너지가 몇 배나 더 든다고 합니다. 그만큼 들어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갈등이 심하고 분쟁이 멈추지 않는 이 시대에 경청이야말로 갈등과 분쟁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묘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길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함께 사는 길은 서로에게 귀를 여는 것부터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요. 귀를 열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경험만이 옳다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행복의 문은 귀를 여는 겸손함이 있을 때만이 열린다는 지혜를 개구리 두 마리와 노인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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