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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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과 전쟁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기호일보
  • 승인 2020.11.06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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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오늘날 석탄의 에너지적 위치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환경오염이라는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주요 연료원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석탄(石炭)이라는 용어는 이미 기원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서양에서는 그리스 로마시대에, 동양에서는 중국 삼국시대에 등장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래 조선시대  「평양지」에 "석탄에 불이 붙어도 연기가 나지 않는" 무연탄(無煙炭)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어 오래전 석탄이 가정연료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탄의 효용성이 급부상하게 된 것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다. 열차와 선박 등 운송 수단의 연료로 이용됐으며 공장의 각종 기계를 가동할 수 있는 동력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섬유산업에서 시작된 혁명은 증기기관, 증기선, 철도, 제철업으로 파급됐는데 한편으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석탄은 필수적이었다. 석탄으로 배와 철도를 움직여야 했던 시절, 석탄을 제때 원활하게 보급 받았을 때만 함대가 움직일 수 있어 이것이 곧 원정(遠征) 성패를 좌우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 개항 이후 선박의 왕래가 가장 많았던 일본에게 있어 석탄의 안정적 공급은 시급한 과제였다. 조선이 선박의 정박지로, 석탄 보급 기지로서 관심이 대두된 것은 임오군란 후인 1882년 10월 일제가 부산 영도의 절영도에 9천900여㎡~1만6천500여㎡ 규모의 석탄부지 설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또한 이즈음 인천 월미도에서는 일본이 석탄 창고 부지를 임의로 점거해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1885년 3월 세칭 거문도점령 사건이 영국에 의해 자행됐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한다는 의도로 시도됐지만 그 내면에는 유사시 러시아 극동함대 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일본은 어부지리로 이해 12월 부산 영도의 절영도에 1만6천195㎡(4천900평)의 일본해군 석탄창고를 설치했고, 매년 지조(地租)로 은화(銀貨) 20원(圓)을 지불한다는 약조를 한국 정부와 ‘정식’으로 체결했다. 이후 약 2년간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던 영국은 철수할 당시 거문도를 영국 해군의 석탄을 공급하는 급탄지로 임차하고 싶다는 교섭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인천 월미도의 일본해군 석탄 창고 문제는 1888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1891년 1월(양력) 일제는 창고 부지 1만6천195㎡를 확보함으로써 그간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던 월미도 저탄고 부지를 합법적으로 조차하는 데 성공했다. 월미도 석탄저장고는 규모면에서 절영도와 동일했으나, 일본이 한국에 지불해야 할 1년 지조(地租)는 절영도보다 60원이 더 많은 80원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때 선박급수소까지 설치했는데 이 석탄창고는 월미도가 관광지로 본격 개발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청나라와 러시아도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지으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인천은 서울로 접근하는 요충지여서 제국주의 열강이 선박의 연료인 석탄을 비축하기 위한 시설을 마련하려 했던 것은 당연했다. 청나라는 산둥 반도에서 인천까지 거리가 짧아 굳이 석탄창고를 요구하지 않았으나 1889년 12월 월미도에 석탄창고 부지 임차를 요청해 일제 석탄 창고 건너편에 부지를 마련했다. 정작 창고를 짓지 않았지만 청일전쟁 후 일제가 흡수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조선에서 실세로 등장한 러시아는 이해 6월 ‘조차월미도지기약계(租借月尾島地基約契)’를 맺어 월미도 서남쪽 일대 4만4천316㎡(1만3천400평)를 조차했다. 지조는 은화(銀貨) 361원76전으로 석탄창고, 병원 등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러일전쟁에서 패배 후 러시아 석탄창고 시설이 일본 해군에 흡수됐음은 물론이다. 

달리 말하면 월미도 석탄 창고 부지를 획득한 나라가 조선을 지배할 수 있었다. 석탄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전투함이라도 한낱 고철더미에 불과했다. 창고 부지 문제가 역사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최정예 발틱함대가 석탄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패전했던 사실로 보면, 전쟁의 승패가 역사 속에서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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