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다. 언니는 없고 누나만 넷이다. 오빠는 없고 형만 한 명 있다. 그와는 9년 터울인데다 같은 수놈이어서인지 살가운 기억이 아예 없다.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을 소환하는 생채기가 가슴 한편에 남았다. 예순 고개와 쉰 고개를 각각 넘겼지만 여전히 서먹서먹하고 데면데면한 이유가 그때 일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국민핵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당시 그는 없는 살림에도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장손이라며 누나들 손에 맡겨진 채 도시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시골에 다니러 왔다. 한겨울인데도 부모님이 새벽같이 들에 나가는 바람에 그와 나는 둘이서 집을 지켰다. 배꼽시계는 쉴 새 없이 울어대는데 굴풋함을 채울 먹거리는 마땅치 않았다. 살강 위에는 쥐잡이용으로 키우던 고양이가 먹다 남은 삶은 보리쌀 한 그릇만 싸늘히 식은 채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당시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침시감(심시감)을 담가 겨울철에 ‘주식’으로 먹었다. 홍시가 되기 전에 감을 따거나 주워다가 장독에 쟁인 뒤 소금물을 붓고 감잎 등속으로 덮어 저장했다. 대개 한두 달 지나면 삼투압 현상으로 떫은 맛이 빠진다. 아삭아삭하고 식감도 그만이다.

어머니는 침시감을 담가둔 장독 뚜껑 위에 제법 묵직한 돌을 얹어뒀다. 뚜껑 자체 무게도 만만찮아 웬만한 태풍에도 날아갈 일이 없는데도 굳이 돌을 얹어둔 이유는 떫은 맛이 제거되기 전에는 열지 말라는 뜻이리라.

나는 돌과 장독 뚜껑이라는 ‘이중 시건장치’를 제거하고 ‘총기’를 탈취할 기운이 없었지만 아홉살이 많은 그에게는 ‘아삭한 침시감 먹기’였다. 그는 깎지도 않은 침시감을 쉴새없이 베어물면서도 약만 올렸다. 하나만, 아니 한 입만 달라는 동생의 눈물 젖은 호소는 귓등으로도 듣질 않았다. 화를 참지 못해 태광 에로이카 라디오를 댓돌에 냅다 던졌다. 

어제 용인시와 완도군이 자매결연을 맺었다. 형제결연이나 남매결연이 아니다. 우리말에 남성명사, 여성명사가 따로 있다는 소릴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런 조어는 필경 외부 요인에 기인할 것이다. 유래야 어떻든 어릴 적 아픈 기억 탓에 형제결연보다는 자매결연이라는 말이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어느 쪽이 자(姉)이고, 어느 쪽이 매(妹) 인지는 모르겠으나 천년만년 자매의 연을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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