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시인)
홍찬선(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시인)

이천시 설봉공원에 있는 충효동산에 가면 이천을 빛낸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고려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천이 낳은 충신과 애국지사, 그리고 효자와 열녀 72명을 기리고 있다. 거란의 소손녕이 침입해 왔을 때 외교의 힘으로 물리친 장위공 서희(章威公 徐熙)장군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 스물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이수흥(李壽興)의사의 동상 등이 우리를 맞이한다. 

잊기 쉬운 선조들을 소개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건너편에 충효동산보다 더 크고 넓게 자리잡고 있는 월전미술관과 월전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이천시에서 한국화의 대가인 월전 장우성(1912~2005)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천시립미술관이다. 잊혀져 가는 한국화의 전통을 되살려 한국의 미를 전 세계에 알린 월전을 높게 대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이 넓은 곳 어디에도 월전의 친일행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장우성은 19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푸른전복’으로 총독상을 받았다. 1942년과 1943년에는 창덕궁상을 받았다. 그의 친일행위는 계속 이어졌다.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1943)과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 1944)에 작품을 내고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을 답사했다. 

월전 장우성의 업적을 기념하는 월전미술관은 지자체 예산으로 지어졌다.
월전 장우성의 업적을 기념하는 월전미술관은 지자체 예산으로 지어졌다.

장우성은 일제가 군국주의와 황국신민화를 고취시키기 위해 연 결전미술전에 ‘항전’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43년 6월 16일자에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을 다루면서 "동양화의 장우성 화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해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고 보도했다. 

친일행위에 대해 일언반구 반성도 하지 않은 사람의 미술관을 지방자치단체 예산으로 지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잃은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분들은 바로 건너편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이런 사례는 월전미술관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음악관 앞에는 ‘난파홍영후선생상(蘭坡洪永厚先生象)’이 세워져 있다. 대리석에 연주회 복장을 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난파의 모습을 멋지게 새겼다. 홍난파(1898~1941)는 일제강점기 때 ‘봉선화’(1920), ‘고향의 봄’(1929), ‘애수의 조선’(1927) 등과 같은 곡으로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작곡가로 유명하다. 이런 사실을 평가해서 세운 석상일 터이다. 

친일행위로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기재된 사학자 이병도의 묘.
친일행위로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기재된 사학자 이병도의 묘.

하지만 난파의 친일활동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인생은 1937년 발생한 수양동우회 사건을 전후해 꼬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이겨 내지 못하고 친일로 돌아섰다. 그해 5월 친일문예단체인 조선문예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4개월 뒤인 9월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바오딩(保定)함락 축하 황군감사 대음악회’에 자신이 작곡한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를 발표했다. 10월에는 ‘음악보국대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출연자 수익금 모두를 국방헌금으로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11월에는 자필로 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입한 것을 후회하며 일제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이듬해인 1938년에는 "천황의 분부를 받들어 팔굉일우(八紘一宇)로 만들자"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해 ‘가정가요1집’에 발표했다. 

홍난파의 서울 가옥.
홍난파의 서울 가옥.

난파는 이런 친일활동을 하면서 안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1941년 8월 30일 경성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43세의 젊은 나이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망함으로써 그의 친일활동이 이 정도로 그칠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커다란 역설일 것이다. 화성시 활초리 283의 1에는 난파의 생가가 쓸쓸하게 복원돼 있다. 말년의 친일활동만 없었다면 보다 더 품위 있게 꾸며졌을지 모른다. 그가 말년에 살았던 서울 송월동의 아름다운 집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친일활동의 그림자는 교육현장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친일활동으로 문제가 된 인사들이 작사했거나 작곡한 교가를 갖고 있는 학교가 경기도내에 89개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2천400여 개 학교의 3.7%에 해당된다. 작곡가별로는 이흥렬(1909~1980) 작곡 교가가 39개 교, 김성태(1910~2012) 18개 교, 김동진(1913~2009) 22개 교, 현제명(1902~1960) 7개 교다. 작사가로는 백낙준 2개 교, 이광수 1개 교다. 초등학교 12개 교, 중학교 25개 교, 고등학교 35개 교, 대학교 17개 교다. 

‘어머니마음’ 등 우리에게 익숙한 곡을 많이 작곡한 이흥렬은 일제강점기인 1944년 친일음악단체인 대화악단을 지휘하고, 음악으로 일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음악보곡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심초’의 김성태는 일제의 어용음악인단체 조선음악협회에 참여했고, 만주국에서 국책악단으로 조직한 만주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해 ‘사랑과 원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가고파’의 김동진도 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때 만주작곡가협회에 가입, 만주국 건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고향생각’을 작곡한 현제명은 1941년 친일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 이사를 맡아 일제를 찬양하는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작곡했다. 1942년에는 음악보국을 목적으로 하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을 결성해 이사장으로 취임, 친일활동을 이어갔다.  

홍난파의 생가는 근대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보존되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홍난파의 생가는 근대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보존되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작곡가가 작곡한 교가가 모두 친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가가 작곡된 것도 대부분 해방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친일활동을 한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부를 수 없다며 교가를 다시 만들려는 학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교가를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경기도도 이흥렬이 작곡한 ‘경기도가’를 새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국사 연구의 태두(泰斗)로까지 칭송받고 있는 두계 이병도(斗溪 李丙燾, 1896~1989)의 그늘은 넓고 깊고도 짙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학자들이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에서 1925년부터 1929년까지 4년 동안 수사관보(修史官補)를 지낸 뒤 1938년 6월까지 촉탁으로 계속 일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 직속의 독립관청으로, 한국역사자료 가운데 식민사관 정립에 유리한 것은 과장하고 불리한 것은 은폐하고 폐기하는 일을 한 곳이다. 이병도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기재돼 있다. 그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야산에 자리잡았다.  

친일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들은 억울할 수 있다. 한국과 배달민족을 위해 기여한 일이 훨씬 많은데 한때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일제강점기 활동으로 전 생애가 폄하되는 게 공정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친일활동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데 인색하다. 

하지만 그런 억울함과 불만은 어쩔 수 없는 업보다. 일제가 중국과 전쟁을 일으킨 1936년부터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한 1945년까지 약 8년 동안 일제의 극에 달했던 철권통치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배를 쫄쫄 굶게 하는 경제적 수탈과 죽음으로 내몬 징병과 징용, 그리고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위안부 강제 동원 등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와중에 일제 강점을 찬양하고 징병에 나가라고 권유하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고, 한국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한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월전기념관에는 장우성 흉상 등이 세워져 있다.
월전기념관에는 장우성 흉상 등이 세워져 있다.

다만, 언제까지 친일을 단죄하는 과거지향적 삶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친일활동에 대해 매듭을 확실하게 짓는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친일활동을 한 사람들이 그런 활동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동족들이 일제의 철권통치에 신음하고, 항일투사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일제에 협력한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일이다. 진심을 담아 민족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한다. 이미 고인이 됐으면 그 후손들이라도 나서야 한다. 

이런 반성과 사과가 이뤄진 뒤에 친일활동의 정도와 한국과 배달민족을 위한 활동을 평가할 수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때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갔던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해 공은 7이고 과는 3이라고 평가했다. 친일활동한 사람들도 경력에서 친일활동을 아예 없애 논란에 휩쓸리지 말고 공은 얼마, 과는 얼마라고 명기해서 후손들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글·사진=홍찬선(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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