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코로나 사태를 한마디로 함축한다면 그것은 ‘공포’다. 이렇다 할 약도 없고 언제 어떻게 걸릴 수 있는지 모르니 멀리하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어서 더욱 그러하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곧 백신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내 차례가 오기까지는 참으로 요원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포가 우리에게 어떠한 것이고 실제 이것이 어떻게 유용되고 있는 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공포는 무지(無知)로부터 온다. 대상을 이해할 수 없고 무지막지해서 어찌할 수 없어 공포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연일 쏟아지는 암울한 코로나 뉴스를 듣다 보면 누구든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 잡히게 된다. 이러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곳이 바로 전쟁과 정치일 것이다

4세기 훈족의 왕 아틸라는 유럽인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성(城)을 공격할 때 마을사람을 앞세웠고 성에 다가서는 그들을 살해해 성곽 주위를 그 시체로 메웠다. 그리고 성을 점령하면 성내의 모든 사람을 도륙했기 때문에 아틸라가 지나가면 공포에 사로잡혀 서로 성문을 열었다. 오죽했으면 로마 사람들이 땅끝 바다로 피신했고 이때 세운 도시가 지금의 베네치아이다. 그후 천년이 지나 몽골 쿠빌라이의 유럽 정벌 때도 같은 살육으로 또 한 번 유럽은 공포에 떨게 된다. 이렇듯 전쟁에서는 극도의 공포심을 일으켜 상대방을 쉽게 제압하곤 한다. 

통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왕정시절 반역자를 처형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지를 찢는 극히 잔인한 형벌을 집행하곤 했다. 사람들이 공포심에서 감히 반역을 생각하지 못할 것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 실세였던 고모부 장성택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김정은의 경우를 보면 더욱 명확하다. 공포의 특성은 "사람의 이성(理性)을 마비시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공포에 접하면 사람들은 이성적 판단보다 무리에 속해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 하고 쉽게 집단행동에 휩쓸린다. 쉽게 말해 어느 정치인이 국민을 빗대 말한 것처럼 들쥐 무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포로 내몰린 집단은 비정상적인 행동 즉 잔혹해지거나 아니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집단은 공포를 해소할 대안책을 찾게 되고 그것에 응축된 분노를 쏟아붓게 된다. 쉽게 말해 폭도로 돌변하기 쉽다는 것이다. 코로나가 터진 후 유럽의 아시안인에 대한 테러나 미국의 흑인 폭동 등이 그 것이다. 지금은 엄청난 돈을 풀고 백신의 희망뉴스를 통해 겨우 달래고는 있지만 잔혹한 폭동이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정부가 코로나 확산에 대한 방역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천지 집회나 태극기 집회 등 엉뚱한 집단에 전가해 시민 분노의 방향을 바꿨던 것 같이, 오히려 공포를 통치수단으로 삼은 것이 그들과 다르다면 다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져서 어떤 통제에도 순응하게 되기도 한다. 이 경우가 어쩌면 국내와 비슷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정부는 소위 K-방역이라는 이름 아래 과도하리 만큼 우리의 모든 일상 생활을 구속하고 있다. 마스크 쓰기를 아예 법으로 강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동선을 빠짐없이 감시하는 일은 이미 당연한 일이 됐다. 더욱이 대중 집회를 정치적인 계산 아래 선택적으로 허락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공포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어 그 어떤 통제 수단도 폭력도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포는 오래가는 것이 아니다. 공포에 익숙해지게 되면 반발의 여지가 발생하게 된다. 지속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공포를 더욱 부풀리거나 새로운 공포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이때 사용되는 수단이 흔히 신뢰성이 강요되는 통계나 뉴스와 같은 인공물이다. 어떤 목적을 갖고 인위적으로 통계를 만들어 내거나 편향된 뉴스만을 노출시키면 다른 것을 접할 길이 없는 국민들은 쉽사리 공포에 빠지게 된다. 사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통계나 뉴스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작업 하냐에 따라 가공적인 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고 꽤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요즘 연일 뉴스에 나오는 고무줄 확진자 숫자나 무시무시한 외국의 코로나 뉴스가 그런 경우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지금의 공포가 아니라 통제에 길들여져서 공포가 극복된 이후에도 가혹한 통제가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처럼 통제가 일상이 되는 사회가 결코 바람직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결국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개개인이 끊임없이 판단력과 지력(智力)을 쌓아야 할 것이고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공포사회는 암흑사회이다. 공포로 이성을 잃은 무리는 통치가 쉬운 법이다. 우리가 혹시 공포사회에 있지나 않은지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민족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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