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미도 등대
상태바
소월미도 등대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기호일보
  • 승인 2020.11.20
  • 1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등대는 항해하는 선박이 육지나 배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할 때 항만의 소재 또는 항구의 입구를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연안의 육지에 설치된 등화를 갖춘 탑 모양의 구조물을 총칭하는 것이다. 등대는 항로표지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설물인데, 선박의 교통량이 많은 항로·항구·만(灣)·해협, 암초가 많은 곳에 세운 근현대의 산물이다. 전근대에서도 연안을 항해할 때나 출입할 때에 섬·곶·산봉우리 등을 이용했고, 횃불이나 봉홧불 또는 꽹과리를 이용해서 밤바다의 뱃길을 알려 줬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는 송(宋)나라와 적극적인 통상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송과 고려 무역의 주요 항로였던 서해는 외교무역선 왕래가 빈번했다. 선박을 이용해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도서지역의 봉수를 이용해 흑산도에서 벽란도까지 항해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당시 도서지역에 설치한 봉수를 통해 항해자가 24시간 식별할 수 있도록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위치를 표시했다고 명기했다.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국제적인 해양 활동은 위축됐지만 세곡을 수송하는 조운(漕運)은 중대사였기 때문에 한양을 왕래하는 선박은 가급적 풍랑이 없는 시기를 택하고 바닷가의 지형지물, 뱃길 표지물, 수심 등 주변 지리 정보를 참조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조선의 개항 후 이 바닷길을 강제로 연 것은 제국의 상인과 군대였다. 각국의 상선과 군함이 들어오면서 항만시설과 더불어 항로표지시설이 절실히 요구됐다. 특히 일제는 선박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해난 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경계표지가 설치되지 않았음을 빙자로 누차 등대 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발송했다. 급기야 1895년 6월부터 9월까지 우리나라 연안 30개소에 항로표지 설치를 위한 위치조사와 사업계획서를 수립,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러시아, 영국 등 열강들의 요구도 빈번했다.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인천항 관세수입 일부를 건설비로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1902년 3월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을 설치하고 미국 외 7개국에 외교문서로 고시했으며 그해 5월부터 팔미도와 소월미도 등대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북장자(北長子)와 백암(白岩) 등에는 해저에 고정시켜 뜨게 한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 1903년 6월 1일 모두 점등했다. 등대와 등표는 우리의 바다, 항구, 선박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열강 이양선의 길잡이 이정표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에도 일제는 대륙 진출을 위한 해상물자 수송 필요에 따라 항로표지시설 확장에 중점을 뒀다. 팔미도는 큰 배들이 경기만을 드나들 수 있는 항로로, 풍도에서 이어지는 항로의 중심이었고, 후일 인천상륙작전에서 이 등대가 진가를 발휘했던 것도 인천항으로 진입하는 첫 번째 섬이었기 때문이다. 소월미도 역시 등대 점등 이후 인천항에서 갖는 지정학적 가치가 배가됐다. 일제는 러일전쟁 중 경인철도 인천역에서 월미도를 거쳐 소월미도에 이르는 임시 군용철도를 개설했는데, 소월미도등대는 소월미도에 내려진 군용화물을 뭍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한 이후 철수하는 일본인에 의해 항로표지 상당수가 의도적으로 파괴됐는데, 8월 27일에는 소월미도등대가 폭파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기존에 설치된 항로표지 중 사용 가능한 시설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패망한 일제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이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해안의 항로표지를 8·15 이전으로 원상복구를 명했으나, 인천 근해에 미군함정이 겨우 출입할 정도의 가등(假燈)만을 설치했을 뿐이었고, 12월 26일에서야 일본으로부터 항로표지 업무를 인계받게 됐다. 

사라진 소월미도등대는 1970년 항무통신운영 업무를 시작했고 1984년 항만관제기능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1998년 인천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설치돼 선박의 위치를 탐지하고 선박과 통신할 수 있는 최신식 설비를 이용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등대는 이제 해양 지킴이에서 탐방객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레저공간으로도 무한 변모하고 있다. 최초의 등대에서 최첨단 시스템으로 변신한 소월미도등대의 미래가 자못 궁금해진다.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