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형 미추홀 오페라단 단장
이도형 미추홀 오페라단 단장

지금은 도시화가 돼 우후죽순처럼 상가 건물과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사통팔달 도로가 정비된 대도시로 변모했지만 나 태어난 이곳 부평의 시골스러운 옛 모습은 나의 머릿속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이 고작이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기에 가난을 당연시하며 살았던 동네에는 끝까지 가 보지도 못한 미군 부대가 넓게 자리하고 있었고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미군부대 막노동으로, 농사일로 가족을 챙기셨다. 동네에서는 아들만 다섯이라는 이유로 육 부자 집으로 소문났던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차츰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시기였지만 동네에는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고아원이 많이 있었고 가끔 아버지가 가져 오시는 꿀꿀이죽을 먹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시며 일제강점기에 양반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나셔서 청년 시절 일본군에 강제 징용돼 일본에서 군 생활을 하시던 중 해방이 돼 귀향을 했지만 공산주의의 거짓 선전과 혹독한 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누님(고모님)과 월남하셨다. 한국군에 자원해 전쟁에 임하면서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중 손에 총상을 입어 제대하게 됐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 형제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도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다섯을 순서대로 앉혀 놓고 아버지의 국가관을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국가관이라야 일제강점기 일본의 악랄한 수탈과 믿어서는 안 되는 공산주의의 허구에 대한 일갈이셨다. 말씀하시면서 가끔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다스리며 소리 없이 눈물도 보이셨지만 아버지는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는 것이니 너희는 나라가 있는 것에 감사하고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무조건 다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말씀과 너희가 있어서 자랑스럽다는 말씀으로 말을 맺으셨다. 

이후에 큰형님이 군에 입대하면서 어머니는 군용 열차가 떠나는 곳까지 배웅을 나가셨지만 아버지는 집에서 큰형님의 절을 받으시며 "그래, 나라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이니 잘 하고 오길 바란다"는 말씀으로 배웅을 대신하셨다. 이듬해에 둘째가 군에 갈 때에도 역시 아버지는 같은 말씀을 하셨고 어머니는 아버지 곁에서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그렇듯 셋째와 넷째 막내인 필자까지도 아버지는 늘 같은 말씀으로 배웅을 해주셨다. "나라에 빚진 것을 군 복무로 일부는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형제는 큰형과 막내인 필자와 나이 차이가 7년이어서 거의 연년생이었기에 한 해에 같이 세 명이 군에 있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나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셨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유산처럼 5형제의 자녀 중 아들이 9명에 딸이 둘이 있는데 할아버지의 국가관에 손자들도 모두 현역으로 입대해 군 생활을 마쳤다. 아버지의 자손들은 대한민국 육·해·공군으로 각자 보직은 달랐지만 철저하고 모범적인 군 생활로 사단장 표창을 비롯해 사단 웅변대회 1등상 수상과 군가 경연대회 표창 등 다양한 재능과 끼로 군 생활을 성실하게 임하기도 했다. 

집안의 남자가 모두 군 생활을 마친 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의 추석 가족 모임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우리 집안 남자들이 모두 병역 의무를 마친 것을 자랑스러워하시며 기념하기를 원하셨다. 아버지의 뜻을 알리고 기리기 위해 2019년 인천 병무청에 병역 명문가 서류를 제출해 선정됐으며 3대 가족 15명 모두 현역으로 영예롭게 복무한 결과 2020년 병역 명문가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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