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조선시대 우리 연해에서 불법 어로를 일삼는 중국 배를 ‘황당선(荒唐船)’이라 불렀다. 대부분은 일본과 중국 어선들로 초기에는 조선의 배와 달랐기 때문에 정체불명의 배 모두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됐다. 이들의 목적은 우리나라 근해의 풍부한 해산물을 잡는 것이었으나 해안에 상륙해 노략질을 자행하는 해적과 다름이 없었고, 밀무역에 간여하거나 때로는 조선인들에 대해 겁탈을 감행하기도 했다. 17~8세기 이래 서양인 역시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려다 길을 잘못 들거나 풍랑으로 표류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정부는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했고 또 선박이 난파됐을 때에는 희망자에 따라 관리를 붙여서 육로를 통해 의주를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송환하기도 했으며 선박을 제공해 해로로 귀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 구미 제국의 선박들이 조선 연해에 연이어 등장했다. 이들 서양 선박들의 출현은 황당선 출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서양의 군함이나 무장상선, 포경선 등이 조선 연해에 출몰하게 되자 조선의 관리들은 이를 서양의 함선을 의미하는 이양선(異樣船) 불렀다. 

조선은 박연과 하멜 등 네덜란드 선인들의 표착을 통해서 서양인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고 또 그들을 통해 서양 내지는 서양인이라는 이질적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1816년 조선 서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온 영국군함 리라(Lyra)호 함장 바실 홀(Basil Hall) 대령은 서해 5도와 군산 앞바다 일대를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했다. 2년 후 「조선 서해안과 류큐도 탐사기(1818년)」를 출간하면서 최초로 방문했던 대청군도를 해도(海圖)에다 표기하고 자신의 부친 이름을 따 ‘Sir James Hall Island’라고 명명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외방인인 그들 일행을 스스럼없이 대하면서 함께 어울리던 조선인들의 선량함과 너그러움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소청도 주민과의 소통을 그의 조선 방문기에 삽도(揷圖)로 넣기도 하였다. 이것이 실측한 해도를 통해 서양에 인천 지역을 알린 최초의 사례로 전한다. 

19세기에 들어 와서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잠입 활동을 통해서 서양인의 존재가 조선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1831년 천주교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가 독립하자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으로부터 조선교구에 대한 관리를 위임받았다. 이로써 프랑스 신부의 조선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1839년 이른바 천주교 박해사건인 ‘기해사옥’이 발생해 앙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탱 등 프랑스 신부 3인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정부는 전통적인 제국주의 종교 보호 정책을 명분으로 내세워 조선 원정(遠征)을 결정했다. 

1846년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Cecile) 제독의 함대가 파병된 이래 2~3차 원정이 있었지만 근해의 해도만 작성됐을 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866년 대원군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 9인과 신도 8천여 명이 순교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하여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이들이 불법적으로 작성한 해도는 프랑스군이 작전을 수행하는데 그나마 유용하게 활용됐다. 이양선의 최종 목적지는 수도 한양이었다. 

서울의 인후지지(咽喉之地)에 해당되는 인천만(仁川灣)이 가장 안전하고 신속하게 한반도의 핵심부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임을 간파한 서양인들은 한강 입구를 찾기 위해 여러 방향의 해로로 접근했는데, 인천 앞바다는 필수 코스였다. 정부는 이양선 출몰이 잦아짐에 따라 경기만 일대 방어망을 강화하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팔미도로부터 인천을 지나 염하에 이르는 수역의 전략적 가치를 특히 부각했다. 

이들 해로는 모두 지방의 조세, 서남해안의 어염(魚鹽) 등을 서울로 수송하는 국가의 생명선으로, 이들에 의한 해로 봉쇄는 국운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 앞바다는 통상로 개척에 혈안이 된 구미 선진국의 상인집단, 식민지 교두보 확보를 꾀했던 제국주의 군대, 그리고 선교거점 확보를 탐색했던 선교사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곳이다. 현대가 비록 19세기와는 그 내용과 양상이 사뭇 다르다 할지라도 인천 앞바다가 여전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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