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 전 산업연구원 부원장
심영섭 전 산업연구원 부원장

‘유감’이란 단어의 뜻풀이를 먼저 하고 싶다. 오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국어사전에서 ‘유감’이란 낱말은 다의적이었다. 그 가운데 ‘유감(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불만스럽게 남아있는 느낌’을 나타내고, ‘유감(有感)’이란 단어는 ‘그냥 느끼는 바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전자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만, 후자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미스터트롯’ 프로그램이 가져 온 트로트 열풍과 트로트 그 자체는 후자의 유감(有感)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감(遺憾)스러운 대목도 없지가 않았다.

코로나19 난국에 온 세상이 움츠렸을 때 우리 곁에 다가와 우울한 마음을 감싸주며 위로하던 게 있었다. 트로트가 바로 그것이다. 나이 탓인가 하고 주위를 돌아보니 온통 트로트 열풍이다. 심지어 장르에 거리를 두던 세대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며 확장성을 보여줄 정도였다. 

무엇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다가가기 쉬운 트로트 가락과 노랫말에 담긴 사랑 타령은 물론이고 고달픈 삶의 애잔한 정서가 세대를 막론하고 공감을 얻어낸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경연이다 보니 참가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했으리라. 부르는 이에 따라서는 원가수들도 감탄할 정도로 우리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채널은 물론이고, 케이블 TV에 이르기까지 반복해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식상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 대중음악 가운데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었나 하는 마음에 흐뭇하기까지 하다.   

트로트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고 있는데, 가슴 한편에 아쉬움 또한 남는 건 웬일일까. 유감(遺憾)스러운 대목이 있었던 건 아닐까.

경연 프로그램의 톱 가수들이 선배 가수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좋았지만, 그 가운데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이 간혹 목격된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대목 중 하나다. 물론 선배 가수들이 특별히 강요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참자의 설움이 문득문득 느껴지는 건 비단 필자뿐일까. 

나이와 선후배를 유달리 따지는 사회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안쓰럽기도 했고, 때로는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비단 가요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선후배 간에 좀 더 자연스러운 수평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물론 수평문화라 해서 반드시 존경할 만한 선배를 내치고 앞서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신참의 겸손함을 지나치게 넘나드는 경우가 없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보다도 더 유감스러운 점은 여기저기 비슷비슷한 종류의 프로그램이 난무한다는 사실이다. 지상파나 종합편성 채널을 막론하고 다수 방송사들이 체면불구하고 따라 베끼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유사한 경연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심지어 장르가 비슷하고 출연진이 중복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트로트 방송은 재방송도 시청률이 고공을 달린다 하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재능 있는 인재에게 등용문 기회를 넓힌다는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너무 시류를 쫓는 건 아닌지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프로그램이 선풍적 인기를 끌면 콘셉트 베끼기가 뒤따른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렇잖아도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사회문화를 방송사가 앞장서 선도하고 조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사회적 파급효과와 시청자로 대변되는 국민의 교육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그냥 보고 넘길 일이 아니다. 문제는 비단 트로트 프로그램만이 그런 게 아니라는 데 있다. 표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씁쓸하기만 하다.

지난 8월 애플의 시가총액이 상장사 중 처음으로 2조 달러를 넘어섰다. 애플의 공동창립자인 스티브 잡스가 9년 전 세상을 떠나자 ‘잡스 없인 망한다’던 바로 그 애플이다. 시장은 잡스를 이어받은 팀 쿡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그는 보란듯이 해냈다. 

그러자, 그가 줄곧 강조해 온 말, 즉 "내가 해야 할 일은 잡스를 따라하지 않는 것"이란 언급이 새삼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트로트 열풍을 넘어 트로트 프로그램 열풍에 휩싸인 우리 사회가 새겨들을 대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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