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든 유리구슬 안에서 하얀 종이가 눈송이처럼 날린다. 영화 ‘맹크(2020)’의 포스터를 보고 자연스레 영화 ‘시민 케인(1941)’의 오프닝이 떠올랐다면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올해 11월 개봉한 ‘맹크’는 79년 전 세상에 나온 영화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 창작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시민 케인’은 1997년, 2007년 미국 영화연구(AFI)가 선정한 100편의 영화 중 1위에 오른 작품이자 2015년 영국 BBC가 선정한 100대 미국 영화에서도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세기의 명작이다. 

촬영과 편집에 있어서도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 준 이 작품은 신문 재벌 케인의 쓸쓸한 죽음을 더듬고 있다.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인 ‘로즈 버드’의 의미를 찾아 한 남성의 일생을 플래시백 기법으로 추적하는 이 영화는 부와 명예로도 회복할 수 없는 평범한 유년의 삶과 그 가치를 반문하고 있다. 불과 25세의 나이에 보편적 진리와 심오한 주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제작, 연출, 주연까지 도맡은 오손 웰즈 감독은 영화계의 이름난 천재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 ‘맹크’는 ‘시민 케인’의 공동 시나리오 작가였던 허먼 J. 맨키비츠의 눈을 통해 관객들이 몰랐던 1930∼40년대 할리우드의 이면을 보여 준다. 

1939년도를 대표하는 ‘오즈의 마법사’부터 막스 브라더스의 코미디 영화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전문 시나리오 작가 맨키비츠는 1940년 알코올중독과 도박에 빠져 회생이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결함 투성이인 그에게 새파랗게 젊은 천재 감독 오손 웰즈가 시나리오를 의뢰한다. 그렇게 집필된 작품이 바로 ‘시민 케인’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쓰라’는 조언에 따라 그는 자연스레 1934년에 만난 황색 언론 재벌인 허스트와 그의 정부 매리언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적절한 가공을 거쳐 시나리오에 녹여 낸다. 실제 맨키비츠가 쓴 ‘시민 케인’은 권력자를 향한 조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까닭에 당시 ‘시민 케인’이 영화화됐을 때 허스트는 자신의 권력을 동원해 상영을 방해한 바 있다. 

영화 ‘맹크’는 ‘시민 케인’ 제작의 숨겨진 이면보다는 대공황의 1930년대가 자본의 논리로 침식돼 가는 과정을 맨키비츠의 눈과 입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비록 알코올에 빠져 사는 위태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를 병들게 한 것은 술 그 자체가 아닌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미국의 정치·사회·경제·예술의 추악함에 있다. 

이 작품은 마지막 순간까지 양심을 버리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 마주한 시대의 어두운 모습을 재조명한다. 130분의 러닝타임 내내 흑백 톤을 유지해 마치 80년 전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고전적인 영상미도 훌륭히 재현했다. 또한 황금기 할리우드의 생생한 고증과 게리 올드만을 비롯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각본은 영화 ‘맹크’의 흥미로운 세계로 관객들을 이끈다. 다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민 케인’ 감상 후 접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진입 장벽은 다소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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