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훈 철학박사
강정훈 철학박사

항일독립운동에서 물리력을 사용하는 무장투쟁의 역할은 중요하다. 가장 강력한 저항의 방편이자 그 효과 또한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원되는 인력과 물자의 양이 막대하고 희생 또한 커서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더구나 여러 제한이 많은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이어가기란 위험도가 너무 높아서 최선의 방법이 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반해 문화투쟁은 순간의 파괴력은 비록 약하지만 꾸준히 축적돼 단단한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여러 방법과 경로를 통해 다채롭게 진행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는다. 물론 이 역시 쉬운 작업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서 정체성을 확보하고 지키려면 긴 호흡의 지구력이 우선 필요하다. 거기에 수반돼야 할 지성과 예술성의 응집과 소모 또한 만만치 않다. 

여기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문화독립운동 방면에서 두드러진 면모를 보였던 경기지역 사람 둘에 주목하고자 한다.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과 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이 바로 그들이다. 민세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지만 그의 활동 범위를 문화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으리라 짐작한다. 노작의 경우는 문학의 측면에서 그의 자리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민세 안재홍
민세 안재홍

#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1891.12.30∼1965.3.1)

민세는 1891년 12월 30일 경기도 수원군 종덕면 계루지리(지금의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부여할 칭호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교육자, 언론인, 사학자, 언어학자, 수필가, 정치인 등 여러 모습들이다. 그만큼 그의 활동이 여러 방면에서 역동성을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근대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1911년 9월부터 1914년 6월까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정치경제과를 다니는 동안 일본 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여운형과의 깊은 친교가 이 시절에 이뤄졌다. 와세다대학 졸업 후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해 신채호 등과 활약했다.

귀국 후에는 교육계에 투신했으나 1919년 평택 학생들의 3·1만세운동을 지도하면서부터 투옥과 출소를 반복하는 고초를 겪게 된다. 해방될 때까지 그는 9번에 걸쳐 체포됐고 총 7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활동의 제약이 많은 국내의 상황이었음에도 민세의 독립투쟁이 계속됐던 탓이다.

1920년대 이후 민세의 활동은 주로 언론인의 모습이었다. 1924년 9월 조선일보의 주필로 시작해서 사장까지 맡으면서 대체로 1935년 전후까지 조선일보에 깊숙이 관여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다른 저작들이 알려지게 된 것도 민세가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부터다. 오래된 신문 조선일보가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유익한 시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민세와 인연이 있었던 시절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신간회와 물산장려회 활동도 이 시기의 일이다. 

화성시 석우동에 위치한 ‘노작문학관’은 홍사용의 업적을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2010년 개관한 이후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화성시 석우동에 위치한 ‘노작문학관’은 홍사용의 업적을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2010년 개관한 이후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1930년대에 일어난 주요 사건 가운데 하나는 1938년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를 출판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정약용(1762∼1836)이 남긴 저술을 모아 전집으로 간행한 이 작업은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역량이 총결집돼 이뤄 낸 성과에 속하기 때문이다. 단지 다산 개인의 문집이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일제에 맞서 ‘조선학’을 수립하려는 노력이 「여유당전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실학(實學)’이라는 개념도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났다. ‘조선조 중후기에 실제에 주목하며 주류인 성리학에 반하는 일련의 사상과 학문의 흐름이 있었는데 그것을 실학이라고 한다.’ 이런 인식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 바로 1930년대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다소 무리한 개념 설정인데다 책의 완성도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조선학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비롯한 일이었으며, 문화적 독립운동의 큰 성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 「여유당전서」 간행은 많은 노력들이 모여 이뤄진 공동 작업의 소산이다. 우선은 다산의 집안 후손들, 특히 외4대손 김성진의 노력이 눈에 띈다. 학문 영역에 있어서는 정인보가 중심 역할을 했다. 그리고 민세 또한 이 전집의 간행에 상당한 힘을 실었다. 옥중에서도 번역과 해석 작업을 했다고 하니 그의 공로가 적지 않다. 

1940년대 민세는 평택에 은거하며 「조선상고사감」을 준비했지만 창씨개명을 거부한 탓에 요시찰인물을 벗어나진 못했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돼 마지막 옥고를 치렀다. 그렇지만 고달픔은 끝나지 않아서 고문의 고통과 후유증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민세 안재홍은 1938년 신조선사에서 정약용의 글을 모아놓은 전집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민세 안재홍은 1938년 신조선사에서 정약용의 글을 모아놓은 전집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해방이 된 1945년 8월 15일 민세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박헌영과 사회주의를 불편하게 여겨 9월에 결별하고 이후 조선국민당을 창당해 우익 정치활동에 나섰다. 그의 기본 입장은 좌우 통합이었으며 이를 위해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주의에 입각한 민공협동론을 주창했다. 이는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의 상쟁을 경계하고 상호 협력을 강조한 그의 독자 이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생각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개의 정치이해집단들은 민세의 의견을 불편하게 여겼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행보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미군정시절에 민정장관을 지내고 1950년에는 평택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같은 해 9월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는 운명을 맞이하면서 사실상 활동 마감의 처지가 됐다. 이후의 정보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으며 결국 1965년 3월 1일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납북 이후로 남한에서 민세에 대한 언급은 금기가 됐다. 자식들의 삶 또한 고단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에 이르기까지 불편한 삶들이 이어졌다. 대한민국정부는 1989년 3월 1일에야 민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좋지 않은 풍문들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친일파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사실 그것은 해방정국 시절에 공산진영에서 민세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최근에는 친일의 성골과 진골들이 그를 육두품으로 끌어들이는 풍경들이 생겨났다. 자신들의 과오를 물타기하는 용도 내지는 물귀신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데 그저 추하고 치졸할 따름이다.

# 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1900.5.17∼1947.1.5)

노작은 1900년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어서 살림의 어려움이 없는 유년기를 경험했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우고 이후 서울로 유학해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에 박종화 등과 더불어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졸업하던 해에 3·1만세운동에 참여해 체포됐으나 나이가 어려 곧 풀려났다. 

1922년 문학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하면서 노작은 문학인의 세계로 본격 진입했다. 1923년에는 토월회에 가입해 서양극을 번역하면서 연극계로 진출했다. 직접 연출을 하고 희곡을 쓰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지속해 1927년에는 극단 ‘산유화회’ 조직을 주도했다. 잡지 간행과 극단 운영에 재산을 털어 매진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노작 홍사용
노작 홍사용

그 와중에 1928년 5월 잡지 「별건곤」에 발표한 평론 ‘조선은 메나리 나라’는 민요 연구와 한국문학사에 상당한 공헌을 한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민요의 우리말 이름인 ‘메나리’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꺾이지 않는 자존감을 드러낸 일이어서 이후 그의 작품 지향에 영향을 미친 계기가 됐다. 거기에서 나아가 문학을 통해 이뤄 낸 문화독립운동의 한 성취라고도 봐야 할 것이다. 

가산을 탕진한 노작은 지병을 얻고 전국을 유랑하는 신세가 됐다. 1939년 조선총독부가 그에게 희곡 ‘김옥균전’을 쓰도록 강요하면서 친일의 방향으로 회유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노작은 이를 거부하고 절필 선언으로 나아갔다. 일개 문인이 권력의 총구 앞에서 지조를 지켜 낸 일에 대해서는 그 당찬 용기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일제의 압력에 펜의 방향을 쉽게 돌려버렸던 당시 여러 문인들의 사연과 비교하자면 노작의 행위는 참으로 귀하고 고고한 일이다.  

고대하던 해방이 되자 노작은 건국운동에 힘을 보태고자 노력했지만 오랜 지병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폐병이 도지면서 1947년 1월 7일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인 2010년 3월 18일 경기도 화성시 석우동에는 그를 기리는 ‘노작홍사용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은 1923년 백조 9월호에 발표했던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시인데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절창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중략)…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 추신-항일음악을 만나려면 평택으로

평택호에 가면 한국소리터가 있다. 그 안에는 지영희국악관, 한국근현대음악관, 한국근현대음악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국악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지영희(1909∼1980)선생의 유지와 유품을 비롯해 귀중한 음악자료들이 7만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2층의 도서관에서는 얼마간 품을 들이면 항일음악과 친일음악의 기준과 내용을 찾을 수도 있다. 그 분야에서 걸출한 성취를 이룬 노동은(1946∼2016)선생의 자취를 쫓다 보면 아마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노릇이겠다. 2020년 12월 3일 현재 전시물 배치의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데 코로나19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전제로 방문해 본다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글·사진=강정훈(철학박사/위례역사문화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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