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섬마을선생님 연구회 운영위원
이영태 섬마을선생님 연구회 운영위원

「삼국유사」에 특정 여인의 납치 이야기가 전한다.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지금 명주)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성하게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좌우에게 "누가 저 꽃을 꺾어 오겠는가?" 하자, 따르는 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곳입니다" 라고 모두 응하지 않았다. …또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수로는 용모가 뛰어나 매양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했다.(「삼국유사」, 수로부인)

깊은 산과 큰못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들이 수로부인을 여러 차례 납치한 이유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 때문이었다. 납치담을 방증할 이외의 자료가 전하지 않기에, 그녀를 지칭하는 수로(水路)를 한자 그대로 풀이해 물길부인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로’는 한자의 외피를 입고 있는 고유어로 물길과는 관계없는 단어이다.

예컨대 술, 수리, 솔, 소래, 살, 사리, 설 등은 최고(最高) 혹은 첫 번째를 가리키는 고유어와 관련된 것들이다. 솔개, 독수리, 설날, 수리날, 설악산 등이 이에 해당하는 단어들이다. 한자의 외피를 입기 전, ‘수로’의 뜻은 물길부인이 아니라 신물들이 납치할 정도로 신라시대 최고(最高)의 미녀를 가리키는 셈이다. ‘수로’와 관련해 김수로왕(金首露王)이라는 단어 또한 ‘머리를 드러낸 왕’이 아니라 ‘쇠를 최고의 기술로 제련하는 자’가 왕이 됐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납치담을 통해 한자어의 뒤에 숨어 있는 고유어 사례를 소개해 봤다. 고유어가 한자 외피를 쓴 것 이외에 고유어와 고유어가 결합돼 다른 표기로 전환된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곶’이 ‘게’와 결합된 ‘꽃게’가 그것이다. 게딱지의 모양이 뾰족한 곶의 형상을 띤 게를 가리키면서 곶게라 했던 게 발음의 편리에 기대 꽃게로 전환된 것이다. 곶감, 꼬치, 고드름, 곡괭이, 꼬챙이 등이 뾰족한 모양과 관련된 게 우연이 아니다. 

한자어의 외피를 입은 고유어와 고유어들 간의 독특한 결합 양상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는 것은 그래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특정 지명을 한자에 기대 유래를 운운하는 일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물며 지역민들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지명이 변경됐다면 그것이 정명(定名)으로 삼을 만한 것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천부 내무과(內務課)에 제출된 각 동정리 총대의 손을 거처 들어온 새 이름을 보면 실로 기괴한 것이 다 있어서 이것이 동정리 주민들의 의사를 종합한 것은 물론 아니며 영어(英語) 이상으로 어려운 것과 얼토당토 아니한 것에는 웃지 아니할 수도 없다는데 아직 신고 아니한 화평리 신화수리 우각리를 빼고는 다음과 같다 하며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므로 곧 부간담회에서 결정하리라 한다.(「조선중앙일보」, 1936.5.29.)

우리말 지명을 일본식 정명(町名)으로 개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다. 기사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이 ‘영어 이상으로 어려운 것과 얼토당토 아니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기존의 것에 단순히 정(町)을 붙인 지명은 차치하더라도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정명이 포함돼 있었다. 예컨대 내리(內里)는 부내정(富內町), 외리(外里)는 경정(京町), 송현리(松峴里)는 수정(壽町)으로 개정하자는 건의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기사 소제목을 ‘괴상한 것도 있는 인천의 새 동정명(洞町名), 얼토당토 안한 것이 있어 결정여하가 주목처’라 부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얼토당토 안한 것을 바로잡는 일은 그런 것들의 현황을 파악하고 자료를 검토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단순히 일본식 정명(町名)을 우리식 정명(定名)으로 전환하는 데 머물 게 아니라 과거의 고유어가 한자어로 전환된 일례처럼, 수로부인을 물길부인으로 이해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명과 관련해 한자의 외피를 입기 전 고유어, 해당 고유어의 보편적 적용 사례 등이 종합돼야 일본식 지명을 극복하고 지역민들이 공공의 기억으로 삼을 만한 정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지난한 일이되 지금이라도 현황을 파악하고 자료를 검토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보다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개연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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