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근대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인천이 점차 산업도시로 변모하게 되자 여성근로자들의 노동 수요도 많아졌고 그들의 목소리도 한층 강화됐다. 각종 공장과 산업시설 확장은 여성들에게 노동의 기회가 확대된 것이었지만, 특히, 정미소, 성냥공장 등으로 대표되던 여성노동 현장에서의 여건은 여전히 가혹한 것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인천 정미소와 성냥공장 여공들의 파업투쟁은 단순한 생계 문제만이 아니라 여성들로 하여금 삶의 권리를 찾고 성차별의 여성문제를 극복한 바탕 위에서 강한 항일민족의식을 전개하는 의지를 보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일본의 한반도 침탈 목적의 하나가 질 좋은 조선 쌀 수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은 우리 쌀을 실어 가기에 혈안이 됐다. 그에 따라 인천은 국내 최대의 쌀 집산지이면서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항으로 떠오르게 됐다. 결과적으로 인천항에서 가공해 백미로 가져가게 됐기 때문에 정미업이 발달하게 됐고 미곡 수출은 정미공업을 번성하게 하는 동인(動因)이 됐다.

 인천의 정미소는 1889년 3월 일본인이 중앙동 4가에 설립한 ‘인천정미소’가 최초인데, 설비에 있어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는 3년 뒤 미국계 무역상 타운센드상회가 세운 타운센드정미소라 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정미소는 계속 늘어났고 한국인 정미소로는 1924년에 유군성이 신흥동에 세운 ‘유군성 정미소’를 필두로 1925년 주명기 정미소, 1929년에 김태훈 정미소, 이흥선 정미소, 이순일 정미소 등이 일본인들과 힘겨운 경쟁을 했다. 

 정미업은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여공들이 하루 종일 좁은 공장에 일렬로 길게 늘어선 작업대에 앉아 쌀알 하나하나를 고르는 거의 모든 과정이 수공업으로 진행되는 노동 집약적 산업이었다. 쌀과 뉘를 선별한다고 해서 선미(選米)작업이라 하는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노동자와 유년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반면, 임금은 턱없이 낮았고 하루에 11∼13시간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1919년 인천과 부산의 7개 정미공장 선미여공 700여 명의 임금인상 요구 파업투쟁을 시작으로 1923년 8월 인천의 가등정미소 여공 500여 명이 임금인하 반대 파업을 단행했고 1924년 10월 12일 인천의 13개 정미소 여공 3천여 명이 ‘선미여공조합’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1917년 인천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는 창업한 지 25년 만에 전국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조선 내에서 최대 성냥공장으로 급성장했다. 당시 조선 성냥공장 노동자는 크게 세 집단으로 분류되는데, 하루 13시간 노동에 1인 평균임금 1원20전을 받는 성인 남녀 노동자와 1인 평균임금 33전을 받는 소년소녀 노동자 그리고 일반가정에서 성냥갑 3천 개를 만들어 납품하면 40전의 임금을 받는 하청노동자 등이었다. 작업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진행됐는데, 성인 여성노동자는 바닥과 상표구역에서 휴대용 성냥의 내·외피에 종이와 상표를 붙여서 성냥갑을 만들거나, 병합구역에서 완성된 성냥갑에 성냥개비를 담거나, 칠 작업 구역에서 성냥갑 옆면에 마찰제를 칠하는 일 등을 담당했다. 그리고 소년소녀 노동자는 대체로 성인 여성노동자들과 같은 작업을 담당했다. 

 당시 열악한 근로 환경과 임금 인하 획책 및 일본인 감독의 성적 희롱에 대한 여성노동자의 항의에서 시작된 조선성냥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쟁의는 1921년 3월부터 1932년 5월까지 네 차례 다섯 번의 동맹파업을 감행하면서 자신들의 투쟁 목표를 생존권 수호에서 노동권 쟁취로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성냥공업통제와 노동조건 악화, 조선성냥공장 간부들의 동맹파업 가담자 전원 해고 및 노동자 신규 모집 등 불법행위로 동맹파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이후 성냥공장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1938년 7월 11일 조선 제2위의 성냥공장이었던 부산성냥공장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단행했다. 일제강점기 인천 여성들의 이러한 노동운동은 한국노동운동사에서도 드문 사례일 뿐만 아니라 그 효시라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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