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일본은 중세시대까지 인구가 적었다. 외국인의 일본귀화를 환영한다는 일본 고서의 내용도있다. 고구려와 일본이 교류하면서 일본으로 처음 귀화한 고구려인은 제16대 히토시토쿠(313~399)천황시대 330년 야마토 오오미지역이었다.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 사당, 유적, 유물들도많이있다.  제33대 츠이코오(여성:592~628)천황시대에 고구려 승려 혜관이 귀화하여 625년에 창건한 이노우에 사찰도 있으며 624년 광개토대왕 후손들 친선방문단이 킨키지역으로와 제35대 쿄오교쿠(여성:642~645)천황을 만난 일도있다.

고구려 견양(개 사육장)이란 지명도 있고 고구려 검과 비단을제조 판매하기도했다.고구려 사신들이 머물던 570년에 건립된 고계관도 있었다. 제44대 모토 마사(715~723)천황이 고구려 마을을 조성한 도쿄무사시에 있는 아키히토 전 일왕이 2017년9월 방문하여 널리 알려져있는 1552년 건립된 고구려사당도 있다.

문헌에 나오는 고구려인 후손들 중에 이노우에·가토·다무라에의해 임진왜란 때 주민들의 참혹한 죽음과 일제강점기 역사를 겪게되는계기가 되었던 큰 사건이 인천 만석동 작약도해역에서 일어났다. 가토와 다무라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일본병력 50만 명 중 3만 명을 이끌고 제2유격대 장수로 함경도까지 진격하며 인천,서울주민들의 많은 죽음이 있었다.

1875년 8월 인천 만석동 작약도 해역에서 일어난 일본 함대 운양호 사건으로일본의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만석동 작약도 해역에서 운양호는영종도를 향해 포격하여 점령하고 곧 이어 강화도까지 점령하게된다. 운양호 함장이 이노우에였다. 운양호사건으로 인해 한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체결된다.

우리측 신헌, 윤온승 일본측 이노우에, 쿠로다가 나서 체결된다. 다음해우리조정에서는 수신사 예조참의 김기수를 일본으로 파견 일본 천황에게 일본 함대 운양호의 인천 만석동 작약도 해역에서 일어난 영종도공격을 강력하게 항의하는 문서를 건네고 사과문을 받아오는 일도있었다.

1882년7월 23일 임오의난이 일어난다. 서울에 있는일본 공사관이 서울 시민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일장기와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공사 하나 후사는 탈출길에 나선다. 양화진~한강~관교리 문학~만석동 월미도까지 탈출하면서 인천시민들에게도 공격을 당해 수명이 죽고 중상자들이 있었다.

하나후사는 다시일본군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여 제물포 조약이 체결된다. 9월 20일 제물포 조약 체결조사 증서 교환이 최종적으로 우리측 박영효, 김만식 일본측 이노우에와 이루어졌다. 1885년 11월 24일 선후조약(한성조약)에서도 우리측 김홍집 일본측 이노우에와 체결되었다.

1906년 2월 1일 일제는통감부를 설치하고 공사관제도를 폐지한다. 행정사무를 맡는 이사청을 설치한다. 인천초대 이사관(지금의 인천시장)에 가토가 있었다. 일본 제99대 스가 내각에 임명된 관방장관 가토, 엑스포 담당상 이노우에 선조는도쿄 무사시지역으로 귀화하고 후생노동상 다무라 선조는 야마지로 지역으로 귀화했다. 모두 고구려인 후손이다. 행정규제개혁담당상 고노 선조는 임진왜란때 귀화한 조선인 후손이다.

일본정치계에서 활약하는 귀화인 후손들은 많이있다. 대표적 인물은 전 일본 수상 다나카다. 조선인 후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완전 일본인화 되었지만 족보, 친인척관계 등 전통풍습을 중요시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의 풍습 못지않게 일본인들도 그런 풍습을 중요시하고있다. 지금의 후손들도 가슴속 깊이 한부분에는 1400년 전부터 인천시와  인척관계가 되는 일본황실의 아키히토 전 일왕이 2001년 밝힌 제50대 간무(781~806)천황의 모친이 백제 무녕왕(무녕왕은 인천 비류왕의 직계후손이다. 비류~초고~구수~무령~성명~간무천황 모친)의 후손이어서 자신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있다고 해 일본국민들에게 놀라움을주었던 그말을 가슴속에 담고있을 것으로 본다. 인천과 한국계 일본각료들 집안과 관계된 문헌 일부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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