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시인
이태희 시인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올해로 28년이 됐다. 한국 현대시를 전공했지만 가장 많이 맡아온 과목은 ‘글쓰기’다. 모든 과목에 피드백이 필요하지만, 특히 글쓰기 과목에서 피드백은 중요한 활동이다.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엔 글쓰기 첨삭에 많은 공을 들였다. 학생들로부터 ‘빨간펜 선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피드백 철이 되면 빨간색 ‘플러스 펜’을 몇 자루씩 소비했다. 

그러다 글쓰기 전담 강의교수가 되면서 1인당 ‘빨간펜’ 사용을 줄였다. 핑계지만 담당하는 학생수가 엄청 늘었기 때문이다. 강좌당 수강 인원이 60명을 웃돌았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게 여겨진다. 강좌당 수강 인원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담당 강좌도 최소 의무 4반에서 최대 6반까지 맡아야 했다. 60명이 넘는 반이 6개 반이면 총원이 400명에 가깝다. 글쓰기 강의에서는 대개 한 학기에 두세 차례 글쓰기 실습을 하고 피드백을 해야 하는데, 200자 원고지로 쳐서 10장 정도 독후감이나 에세이에 첨삭 피드백을 하는 일은 엄청난 노동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한 차례 피드백 철을 지나고 나면 말 그대로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요령을 부리기 시작했다. 피드백 횟수도 줄이고, 제출하는 글쓰기 과제의 원고량도 대폭 줄였다. 2천 자에서 1천 자로 다시 500자로! 수강생들은 대부분 선택이 아닌 필수 과목으로 수강하기 때문에 글쓰기에 흥미가 있는 학생은 드물었고, 원고량이 적다는 것에 거의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어쩌다 500자는 너무 짧다고, 얘기 꺼내다 마무리해야 한다고 아쉬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길게 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군더더기 없이 압축적으로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라는 이유를 들면서 달랬다.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정책에 의해 수강 인원과 강좌 수가 줄어들면서 그럭저럭 피드백을 수행하고 있던 차에, 지난 학기에는 전면 온라인 수업이라는 새로운 상황과 직면했다. 처음에는 강의 콘텐츠를 영상으로 만드는 일에 익숙지 않아 애를 먹었다. 강의 영상 제작에 조금 익숙해지자 피드백 철이 다가왔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제출한 원고에 첨삭한 후 수업 시간 틈틈이 개별적으로 피드백 내용을 설명해주는 방식이었는데, 대면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학생들이 이러닝 시스템 게시판에 제출한 글쓰기 원고를 출력한 후, 빨간펜 첨삭을 하고, 그것을 다시 사진 찍어서 게시판에 답글로 올렸다.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지만, 비대면 온라인 수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피드백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지난여름, 글쓰기 동료 교수들과의 온라인 워크숍에서, 과제 출력과 촬영의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피드백 전달 방식에 대한 솔깃한 ‘정보’를 얻었다. PDF 파일의 ‘주석’ 기능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시쳇말과 딱 맞았다. 그런데 아뿔싸, PDF의 주석 기능은 유료 버전에서 가능한 기능이란다. 다시 출력→첨삭→촬영→업로드 절차를 거쳐야 하나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한글’에 ‘새메모’라는 기능이 추가된 것을 알았다. 구세주였다. 온라인 피드백에 아주 적합한 기능이었다. 

그렇게 나름 피드백 잘하고 있노라고 느긋하게 보내던 차에, 끊임없이 효과적인 피드백 방법을 고민하는 후배이자 동료 교수의 모습을 접하고, 과연 나의 피드백은 ‘노동’의 수고로움을 넘어 ‘효과적인’ 독자 중심 수강생 중심의 피드백이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추천한 ‘효과적인 피드백 방법’이라는 책도 주문했다. 며칠 후 도착한 책에는 딱히 새로운 ‘효과적인 피드백 방법’이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끊임없이 피드백 방법을 고민하는 후배이자 동료 교수의 자세가 나에게 반성적 피드백으로 작동하게 된 것은 퍽 고마운 일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