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김준우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모든 사물에는 생명 주기라는 것이 있다. 사람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하물며 기술이나 산(山)도 그렇다. 모든 것이 흥할 때가 있고 결국 소멸된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위치를 이러한 시간표에 비춰 보는 것은 거울 보듯이 우리 자신을 쳐다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일본이 1858년 미국의 압력으로 문을 연 지 100년 만에 패권국 미국을 침략했다. 한국은 1910년 나라가 망한 지 100년 만에 세계 몇째의 부국(富國)으로 올라섰다. 남들은 우리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뜯어보면 일본과 한국의 놀라운 발전은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를 향한 야성이었다.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은 이토히로부미와 같은 개혁 인재들을 갖게 된 것이 천운이었다. 그들은 패권국 영국과 구미 열강을 배우기 위해 세계로 뛰어나갔다. 이들이 철저히 열강의 모든 것, 정신부터 심지어 먹거리 입을 거리 모든 것은 쫓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빠른 시일 안에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아시아 경영을 외쳤고 결국 미국 침공에 이르게 된다. 

열강이 되려고 하는 그야말로 동물적인 야성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에 걸친 수출주도의 스탈린식 경제개발 계획을 펼쳐 왔다. 거의 전쟁 수준의 경제개발이었다. 마침 미국의 산업구조 조정에 따른 제조업의 아시아 이전 그리고 중동 건설과 파독 광부로부터의 달러 확보는 경제개발을 위한 젖줄이었고 여기에 월남전과 같은 특수가 기적의 운을 더한 것이다. 더욱이 재벌 총수들의 세계를 향한 리더십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따른 농촌으로부터 충분한 인력공급 그리고 높은 교육열 등 아시아의 용으로 태어날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조건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낸 것은 우리의 세계화에 대한 야성이었다. 소위 없는 것도 판다고 하는 종합상사 인력은 전 세계를 하이에나처럼 누비고 다녔다. 선진국들의 손이 닿지 않는 국가들을 상대로 촉수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얼마나 억척이었는 지 대우는 유럽 폴란드에서 미국 GM을 누르고 자동차 기업을 따낼 정도였다. 지역에 관계없이 세계 어떤 곳에서도 뛰고 있는 한국 인력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세계로 나가려는 야성이 이때는 있었던 것이다. "하면 된다" 라는 투지, 그리고 세계 경영이라는 야망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 

진정한 정복자 칭기즈칸이 품었고 이룩했던 세계 정복을 세계경영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그때 우리는 품었던 것이다. 최근 우리 현실은 그런 야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야성은커녕 패기도 간 곳이 없다.  야성을 먹고 살아야 할, 젊은이들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유야 천 가지도 될 것이다. 일테면 정치권의 부패, 불안한 정보화, 믿었던 가치관의 붕괴, 갈 곳 없는 일자리, 길들여진 풍요로움 등 야성이 길러질 수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오히려 중국, 베트남에서 보듯 그들에게서 우리의 50년대 60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불안하다. 

수년 전 중국 굴지의 전자회사인 화웨이 기업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붉은 글씨로 정문 앞에 써 붙였듯이 공식적으로 내건 그들의 목표가 "타도삼성"이었다. 칼을 목에 댄 듯 온 몸이 오싹한다. 목표가 뚜렷하면 쉽게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야성을 잃은 사자가 어떻게 광야에서 살 수 있겠는 가. 그가 갈 곳은 결국 도움 없이는 살수 없는 동물원 우리 안일 것이다. 절대적 실리로 움직이는 국제 관계는 이러한 광야나 다름없다. 발전이 아닌 생존을 위해서라도 야성을 되찾아야 한다. 세계에 뛰어나갈 야성을 갖춘 리더를 길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정치가, 산업가, 그리고 교육자가 함께 만들지 못하면 그 야성을 어떻게 되찾아 올 수 있겠는가. 올라갈 때보다 떨어질 때 고통스러운 법이다. 냉정한 국제 질서 속에서 성장을 위한 야성을 잃는다면 누가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 결국 외교에서 국방에서 그리고 경제에서 실패하면 결국 우리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베네수엘라와 같이 부도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 보건대 국가가 추락하고 있어도 어찌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어쩌면 다시 예전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마저 앞선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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