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해룡 인천남부아동보호전문기관장
어해룡 인천남부아동보호전문기관장

필자는 대략 24년을 아동복지 영역에서 일해 왔다. 10년 정도는 원가정이나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행동문제나 심리·정서적인 문제로 분리·보호된 아이들을 상담하고 사례 관리했고, 나머지는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아동학대 신고접수, 현장조사, 사례관리 등과 관련된 일을 했다. 그동안 꽤 많은 아이와 그 가족들을 만났다. 이제는 30대가 됐을 남매가 생각난다. 남매를 만난 것은 남매 중 첫째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남매는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와 여관방을 전전하며 신체 학대와 방임을 당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이웃의 신고로 분리·보호됐다. 

알코올중독과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던 아버지는 남매만 여관에 둔 채 며칠씩 나가 전국을 떠돌았다. 돌아온 아버지는 술에 취해 새벽까지 남매를 꿇려 놓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반복했고, 남매가 졸기라도 할라치면 감당하기 어려운 매질을 했다. 남매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집을 나간 후 연락이 끊겼다. 이후 아버지는 남매에게 화풀이했다. 손발로 때리고 술에 취하면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렸다. 마시던 소주병을 던져 첫째의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남매는 분리·보호되고 나서도 아버지가 찾아올까 두려워했다. 어느 겨울밤 연락도 없이 술에 취해 무작정 센터로 찾아온 아버지는 청와대에서 자신이 있는 곳을 알게 돼 산속 깊은 곳으로 숨어야 한다며 남매의 퇴소를 요구했다. 몇 시간 실랑이 끝에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는 설득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버지 지인의 전화를 통해 술을 더 마시고 길에서 자다 동사했다는 소식과 어젯밤에 아이들을 돌려보냈으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을 같이 접했다. 

아직도 그날의 황망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죄책감과 남매를 돌려보냈으면 부와 함께 위험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과 그날 밤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었고, 동생에게 이제는 욕하고 때릴 아빠도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는 누나의 퀭한 눈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부모를 대신 보호하겠노라 마음 깊이 다짐했지만, 남매를 대신해 살아 줄 수는 없었고 심리치료와 일시보호가 끝난 아이들은 장기보호 시설로 전원됐다. 가끔 소식을 나눴으나 얼마 후 그마저도 끊겼다.

벌써 19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남매의 울음소리와 눈빛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동보호 체계가 시작된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다른 아이들이 그 남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세상이 바뀌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동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할 어른들 특히, 보호자들에게 상처를 입는다.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자신의 보호자에게 받은 상처는 타인을 믿지 못하게 하고 세상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결핍되고 박탈된 애정과 관심을 채우고 싶어 하지만 또다시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양가감정에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간신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대받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같이 견뎌줄 수 있는 관심과 보살핌이다. 세상에 나 혼자 던져진 것 같은 두려움에 처한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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