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2020년 12월 말. 늘 그렇듯이 이맘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딘가에 털퍼덕 주저앉아 눈길을 내리깐 채로 상념에 젖어 한 해를 회고한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쉰다.

참아내기 힘들 정도로 지쳤고, 여기저기 생긴 삶의 상처들이 채 아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아냈다는 안도의 숨이다. 그리고 이겨냈다는 승리의 기쁨, 행복함을 은근히 숨긴 한숨이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혼란과 고통이 유독 심했던 같다. 

한국 사회는 비정상적이고, 혼란을 야기시키며, 또 사회 전체를 갈등과 불신과 적대감의 도가니로 만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몇몇 문제들은 정치집단 간, 지역 간, 세대 간, 남녀 간 갈등을 최대치로 올렸고, 모든 국민들을 ‘정치동물’로 격하시켰다. 

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불행하고, 힘든 사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사건이 오랜만에 발생했다.

소위 ‘코로나 사태’로 불리운 중국 우한 폐렴 발생으로 전 세계는 팬데믹 상태에 빠졌다. 지구 곳곳에 죽음의 냄새와 불안감, 공포와 절망들이 거리와 집 안에 가득찼고, 일부 지역에서는 역사에서 흔히 있었던 것처럼 정치권력들의 사회통제가 심해졌다.

물론 역사학자의 관점으로 비교하면 상황이 이보다 더 심각했던 해가 기록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았다. 때문에 다소나마 위안을 갖고, 때로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반 발은 빠져나와 ‘국외자(outsider)’나 ‘관찰자(obsever)’의 입장으로 관찰도 했다.  

원래 인간의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고난을 이겨내면서 지금껏 생존한 것이 인류이다. 동물과 식물보다도 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대부분은 탈락하고, 살아남은 일부 사람들의 후손이 현재 우리이다.

생각해본다.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이러한 난관들을 극복했을까? 수많은 방식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망각’과 새로운 ‘시작’이다. 그런데 그를 위해서는 ‘공간’도 그렇지만 ‘시간’의 자각이 필요하다.

시간은 ‘태초(‘옛날 옛적에’)’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금도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으로 인식되는 존재에 섞여 있다.

물론 최근에는 ‘시간’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6차원 7차원 이상의 상황까지 주장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인식하는 개념의 시간은 아니다. 

인간이 공간에서 한 부분을 떼어내 시간을 발명하고, 자연의 일부가 아닌 역사적 존재로서 탈바꿈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시간 덕분에 비로소 ‘시작’과 ‘끝’을 인식할 수 있었고 ‘인과관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인류는‘시지프스의 신화’에서처럼 맹목적인 반복운동이 아니라 ‘因’을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果’를 조절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변환운동을 하면서 문명은 어렵게 시작됐다.

‘시간’을 통해서 인류는 잃은 것도 얻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중의 하나.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막연하게 여겼던 ‘생사(生死)’에 대해 처음으로 확실한 자각을 할 수 있었다.

죽음의 상태와 죽음에 대한 불안감은 구체성을 띠면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이로 인해 삶의 짧음, 덧없음도 자각했다. 따라서 필사적으로 시간을 지배하려는 헛된 노력들을 기울였고, 결국은 그 시간을 ‘확장’과 ‘지양’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방식으로 관리하는 능력을 갖게 됐다. 

또 부모와 자식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고, 이 관계도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사실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혈육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계열화가 이뤄져 공존을 토대로 한 사회구성이 가능해진 단초를 제공했다. 또 사회와 나라, 민족이라는 근원과 성분이 불분명한 집단 또는 단위들을 계통화시켜 큰 사회, 문명의 탄생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정말 또 하나 중요한 기능을 갖게 됐다. 인류는 늘 따라다니는 현재의 ‘절망’에서 탈출하고, 다가올 새로운 시간으로 이동하고, 희망을 갖는 방법을 발견했다.

양적 질적으로 변신을 해서 새로운 존재로 재생(regeneration)하는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의미(meaning)’를 두면서 ‘기념(memory)’할 수 있으며, ‘망각(oblivion)’을 방지하고 ‘각인(reprinting)’시킬 수 있는 날을 설정했다. 그 다음에야 직전까지 모든 헌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로 탄생해서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1년’이라는 단위를 설정하고, 첫 주기가 시작하는 첫날을 ‘새해’라고 설정한 것이다.

‘새해’의 기준은 달랐지만, 고대에 많은 문화권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해(태양)’가 짧아지다가 정점을 찍고 다시 길어지는 사이클(운동 주기)의 첫날인 동짓날을 새해로 삼았다. 부여처럼 ‘은력’을 차용해 12월을 새해로 삼기도 했다.

지금은 양력 또는 음력의 1월 첫날을 새해라고 정했지만, 인류는 ‘멀치아 엘리아데’나 ‘제임스 조지 프레이져’ 등의 종교학자와 인류학자들이 소개했듯이 오랫동안 자기들만의 고유한 새해들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과 집단들은 해마다 이날을 전후해 다 함께 모여 변신을 일으킬 수 있도록 다양한 ‘푸닥거리’, ‘의식(ritual)’들을 거룩하게 행했다. 

우리는 단군신화 속에 삶의 재생과 역사의 부활을 바라보는 인식과 논리, 그리고 실천 방법이 상징과 은유를 통해서 표현되고 전달했다.

곰과 호랑이로 상징된 존재들은 깜깜한 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해를 보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변신을 빌었고, 결국은 21일 만에 뜻을 이룬 후에 ‘인간’이라는 새 존재로 재생하고 부활했다. 이후 몇 차례 더 질적으로 성숙한 다음에 단군왕검을 낳았고, 그가 ‘건설(refoundation)’한 것이 재생과 빛의 의미를 내포한 ‘조선’ 이라는 정치체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 해 동안 고단한 삶, 몸과 마음의 상처들로 탈색된 행복,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절망으로 치장된 허물을 벗고, 빛과 따뜻함과 치유와 치료를 통해서 새살이 돋고, 건강함과 용기로 채워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감과 공포, 좌절을 가졌던, 또 일부 사람들에게는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헌 해’가 지나가는 중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새날의 빛은 비추고, 희망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상처 난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정하게 먹으면서 단 며칠만 잘 버티면 새날이 온다.

환한 표정으로 맘껏 새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릴 수 있다. 하지만 목표의식을 더 분명해야 하고, 실현방법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찾으며, 견딜 힘을 키우는 자세와 실질적인 노력을 할 결심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이번에 맞이하는 새해는 내보내는 ‘헌 해’보다는 더 희망적이고, 누리는 기쁨도 많아질 수 있다.

허물을 벗고 재생하려면 그만큼 더 용틀임해야 하고, 신기까지 보태가면서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알룩달룩한 때때옷을 입고,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한 사내애들이 텅 빈 논바닥에서 태극기가 선명한 방패연을 높이 날리고, 얼음판에서 비틀거리는 팽이를 채찍질하던 코흘리개 어린 날의 설날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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