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영하 20도를 웃도는 한겨울 임진강가에는 기러기들이 철책선을 넘나들며 날갯짓하고 울어댄다. 내게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 존재들이다. 작년 내내 논과 들판, 강가에서 마주쳤고,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생명과 분단의 의미를 재각(再覺)시키는 매개체였다. 또 들고 다니는 카메라에 찍혀 유튜브에도 여러 번 등장한 게스트들이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그들은 분명 날 기억했을 것이고, 파주로 귀향한 후에 다시 재회한 날 보며 웃음 지으면서 내 이야기 나눌 것이다. 그게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그들은 내게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겨울을 보내고 이른 봄날에 돌아간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는 우리 민족의 원향 가운데 하나이다. 마주할 때마다 한반도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장엄한 감동을 되살려주고, 역사의 ‘한’을 달래주는 바이칼호. 코로나까지 겹쳐 2년 가까이 못 본 바이칼의 내음과 모습을 지칠질 모르는 힘찬 날개짓과 빈 들판에 푹 숙인 채 부리질하는 머리에서 맡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별한 애정을 갖는 까닭이 또 있다. 나는 기러기떼들의 초점 먼 눈깔, 힘 넘치는 날개짓을 보면 경외감마저 솟는다. 지난 해 3월, 안개 자욱한 동틀 무렵에 시베리아를 향해 발진한 무리들로 뒤덮인 임징강 가의 하늘에서 확인된 공동체 의식과 리더십은 생존의 위대함과 장엄함으로 영혼을 떨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들의 존재가 남달리 내 가슴에 더 사무치는 이유는 강렬한 의지와 이상때문이다. 현실에 머물면서, 연명하는 삶이 아니라 나은 먹이를 구해, 새끼들의 안전하고 복된 삶을 위하는 ‘이상’과 그리고 ‘날개’라는 숙명을 한껏 활용해 멀리 멀리 불확실한 이상향을 향해 온 기러기들의 ‘의지’이다. 

나는 걷기보다는 뛰는 걸 좋아하고, 육지를 떠나 바다로 나가기를 좋아하고 ‘평지’보다는 깊이와 높이를 지향한다. 그래서 인간의 물리적인 한계, 정신적인 굴레를 극복하려고 동굴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연구실에서 몇 가지 일들을 시도하고 흉내 낸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날기’를 포기할 수 없어 뗏목으로 대한해협을 건널 때 ‘해모수’라는 이름과 하늘을 나는 5마리 용들을 그린 돛을 달았다. 중국의 절강성에서 한국을 향해 뗏목 탐험할 때는 ‘동아지중해호’의 돛에 강찬모 화백이 그린 삼족오를, 처음부터 실패했지만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오려는 ‘동아문명호’의 돛에는 신동호 화백이 그린 삼족오를 붙였었다. 이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열망은 강했지만, 실제로 날아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꿈을 포기하진 않았고, 그 때문인지 새들을 보면 잠재된 욕망이 솟구쳐 마음의 폭풍을 일으킨다. 

그럼 유독 나만 그런 걸까? 아니다. 인류는 조류의 단계를 거쳐서 진화한 결정체이다. 계통발생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날기의 유전적 형질이 들어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중기구석기 시대 이후이겠지만) 극소수의 인간들은 하늘을 유영하는 새들을 관찰하면서 맹수의 공격에서 재빨리 도망칠 마음으로, 더 많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더 멀리 이동하기 위해서 ‘날기’를 희망했다. 그러다가(신석기 시대 이후) 점차 하늘을 ‘무한’과 ‘공간’, ‘생명의 어버이’라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위력이 폭발적으로 커졌고. 신앙으로 변모했다. 이어 문명(5000년 전을 전후)이 시작되면서 삶의 의미를 더 진지하게 이해하고, 더 높고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면서 하늘은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이고, 심지어는 미학적인 대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바라보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변모하던 간에 하늘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불사가의’, ‘불가지’, ‘불가능’의 영역이었고, 더욱이 ‘날기’는 ‘영생’을 빼놓고는 인간이 최후로 극복할 마지막 한계상황이었다.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지력, 기술력을 투자해서 완성해야할 궁극의 영역이었다. 특히 15세기 이후에 ‘지리상의 대발견’으로 바다의 한계를 극복했고, 19세기에 히말라야의 고봉등정(summit)으로 평지를 뛰어넘고 난 후에는 주요한 목표가 ‘우주’와 ‘날기’였다. 

그리이스 시대 때 반쯤은 신의 피가 섞인 ‘이카로스는 아버지가 깃털과 밀랍을 섞어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았다. ‘무한’과 ‘자유’ 속을 날며 신바람 난 그는 멈춤을 모른 채 올라갔고, 결국은 뜨거운 햇살에 밀랍이 녹아내려 에게해로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조나단’이라는 갈매기(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는 ‘가장 높이 나르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The gull sees farthest who flies highest).’는 신념을 갖고 부단히 비상을 시도했다. 대중 갈매기들이 부둣가에서 썩은 고기로 포식하든 말든, 그들의 곱지못한 시선과 방해에 개의치 않고 날개죽지를 몇 번씩 부러뜨려가며 비상을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시공(時空)의 한계를 뚫고 ‘하늘’이 되었다.

그럼 우리는?

우리야말로 하늘을 특별하게 섬겼고, 날기를 염원했던 집단이었다. 

특히 천손의식과 자의식이 강했던 고구려인들은 유라시아 세계에 널리 알려질 정도로 모자마다 새깃을 꽂은(조우관) 사람들이었다. 백제와 신라도 그보다는 덜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문화의 유물과 기록들, 삶의 흔적들에서는 ‘하늘’과 ‘날기’의 잔영들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다만 욕망과 능력을 오랫동안 숨겨두고, 억지로 은인자중하다가 지쳤고, 변질됐을 뿐이다. 

21세기 이제 때가 다가온 것 같다. 이제 묶인 채로 ‘장사의 겨드랑이’에 숨겨졌던 금빛 ‘날개’를 펼쳐야 하지 않을까? 

‘물극필반(物極必反)’

미래는 무수한 역사의 무덤들을 뚫고 환생한 한줄기 선분홍 빛이다.

- 서너 마리 기러기들, 얼음짱 위를 날다 -  

 

 한 겨울
 얼음기 서걱거리는 강 가 빈 들녘에
 얌전히들 몰려 앉아  
 콕 콕  
 떨궈 놓은 낱알들 
 맛나게 쪼아 먹으며.
 하마 반 고개 넘어 볼그레한 햇덩일 향해
 열 지어 
 긴 목 쭉 뺀 채로
 햇물들 들이키는  
 기러기떼들. 
 뜀박질한 소년의 서툰 돌팔매질에 
 놀란 척 
 느긋하게 떠오르며
 청(淸) 빛 하늘에 
 다닥다닥 연시처럼 매달린다. 

 

 멀리 
 아주 저 멀리 북 녘. 
 얼음가루들 휘날리는 
 바이칼 알혼섬에서
 주워 온, 
 찬바람에 얼려가며 
 6000리 길 
 마른 날개 쭉지에 얹어 온
 네안데르탈인 소녀가 떨군 
 5만 년 전 꿈 알맹이들  
 철 없는  
 소년의 까까머리통 위로 퐁당퐁당 떨구곤.
 빙 빙 
 빙 빙 
 빈 들판들 유영하는데. 

 

 출가한 
 너 댓 마리 애기러기
 쨍쨍 
 금 간 임진강 얼음짱 위로 날라 와  
 묻혀온 바이칼의 눈가루들 
 훌 훌 털어낸다.

 

 어쩌다 
 표착한 소년의 혼에
 자유의 그림자들 길다랗게 드리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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