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인천 개항문제가 제기된 것은 1879년 4월로 원산 개항이 결정되기 2개월 전이었다.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항장으로 동해안의 원산이 선택된 데에는 러시아 견제라는 조선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이었다. 반면 하나부사(花房義質) 일본공사가 조선과 교섭에서 서해안의 인천을 고집하자 조선 측은 인천이 서울과 가까워 인심의 동요를 불러오고 몇 개의 포대를 축조한 보장중지임을 내세워 완강히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경기의 교동과 남양을 제시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중국 동향 파악과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을 필요로 했다. 

인천 개항 협상의 난제는 일본으로 미곡 유출 문제였다. 조선 측은 인천이 개항되면 쌀 유출로 인해 경성의 미가(米價)가 폭등해 서민들이 곤란해질 것이기에 먼저 세금에 관한 법칙을 협정하고 방곡령(防穀令)을 부산에까지 미치게 한다면 수락할 것을 제시했다. 반면 일본은 인천항에만 국한해 미곡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 조항만을 강요함에 따라 부득이 일본의 요구대로 1881년 2월 1일(양력 2월 28일)에 이르러 앞으로 20개월 후에 인천을 개항하는데 동의한다고 성명하였다. 

인천이 개항지로 부상한 뒤 1년 10개월 만에 완전히 타결된 것이다. 그러나 인천 개항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전국의 유림(儒林)들이 인천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됐고 강원도 유생 홍재학이 능지처참 당하는 형국으로 진전됐다. 급기야 1882년 2월 26일 영남유생 이만손 등이 궐기해 「조선책략」을 반입한 김홍집을 규탄하고 척사(斥邪)를 소청하는 ‘영남만인소’가 등장하게 됐다. 인천 개항 반대는 초기 경제적 문제를 제기했지만 인천항에서의 미곡 수출 금지를 조건으로 개항이 결정되자 반대 상소의 초점은 국방 문제로 이동했다. 

정부는 마찬가지로 여론에 대한 강경억제책으로 일관하면서도 김홍집을 김포로 유배보내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는데, 인천 개항 반대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충청도 유생 백낙관이 효수되는 사태로까지 확대됐다. 그럼에도 조선 정부는 ‘연미국(聯美國)’의 일환으로 1882년 4월 6일(양력 5월 22일) 인천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이어 4월 21일 조영수호통상조약, 5월 15일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개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조선의 여론을 무시하고 일본의 이해에 따라 일방적으로 강행된 인천 개항 시도는 뜻하지 않게 6월 9일(양력 7월 23일) 임오군란이 돌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군란은 일본공사관의 습격으로 이어졌고, 하나부사 공사는 우여곡절 끝에 제물포로 피신해 목숨을 부지한 채 영국 측량선 플라잉피시호의 도움을 받아 6월 15일(양력 7월 29일) 가까스로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 육해군을 거느리고 인천 제물포에 돌아와 7월 3일(양력 8월 16일) 입경(入京)해 군란 이후 처리문제로 분주하다 7월 17일(양력 8월 30일) 제물포조약을 성사시켰다. 

일본 정부는 자국 공사관이 습격당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8월 7일(양력 9월 18일) 하나부사를 체임하고 새로 다케조에(竹添)를 공사로 교체했는데, 이때부터 10월로 예정됐던 인천 개항 문제가 당면 과제로 부각됐다. 일본 정부는 그의 상신에 따라 인천 개항 방침을 재확인하고 일본인들에게 1883년 1월 1일(음력 1882년 11월 23일)부터 인천항에서 통상할 수 있다고 포고했다. 1월 1일은 메이지유신(1868년) 정부가 양력을 채택한 후 자국 국민에게 강요한 삼대절(三大節) 중 하나였을 뿐, 우리에게는 일방적으로 통고받은 날에 불과했다. 

일본이 양력 새해 첫날을 인천 개항일로 설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천 개항에 대한 기대와 가치를 높게 표명한 것인 반면, 우리 정부는 인천 개항을 억지로 해야만 했고 또한 유림들의 거센 반발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성사된 것이었던 만큼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기도 했다.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3번째로 개항한 도시였지만 명실상부하게 국제적 개항장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식민지 거점 도시로 진전됨에 따라 타율적 개항에 따른 정체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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