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인천시 서구청장
이재현 인천시 서구청장

이맘때면 더 그리운 분이 있다. 고(故) 이태석 신부님이다. 영화보다 더한 삶을 사셨던 신부님은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도 사랑과 나눔을 널리 전하고 가셨다. 내겐 힘들거나 고민이 있을 때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분이다. 어느새 선종 11주기를 맞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신부님은 늘 내 옆에서 힘이 돼주신다.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의 기회가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지인 톤즈에 간 것, 그곳에서 이태석 신부님을 만난 것임을 나는 잘 안다. 

그 이후로 내 삶엔 큰 변화가 생겼다. 톤즈에 가기 전까진 목표물만 보고 전력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일’, ‘성과’에만 매달린 채 앞만 보고 달렸다. 삶의 최우선 순위 역시 일이었다. 그게 성공의 척도이자 삶의 행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에 파묻힐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늘어갔다. 일과 행복의 괴리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 톤즈 그리고 신부님과 만남이 운명처럼 이뤄졌다. 

2003년 남수단 톤즈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였다. 하루 단 한 끼를 멀건 수수죽으로 대신하고, 흙탕물을 먹는 이들의 건강 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다. 찢어진 옷 한 벌도 호사스러울 만큼 아이들은 남루했고, 병들거나 다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손과 발이 문드러지는 나환우도 넘쳐났다. 내가 톤즈에서 본, 유일한 희망은 이태석 신부님이었다. 불모의 땅에서 미래를 꿈꿔본 적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부님은 어떤 역할이든 해내야 했다. 그럼에도 버거워하기는커녕 기쁘고 행복한 일이라 생각했다. 

사제로서 그들과 어울리고 위로하며 진정한 선교의 힘을 보여줬고, 의사로서 매일 200여 명이 넘는 환자를 성심성의껏 돌봤다. 밤이든 새벽이든 찾아오는 환자를 마다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픈 몸으로 먼 거리를 걸어오는 이들을 위해 틈틈이 짬을 내 이동진료도 실시했다. ‘예수님이라면 성당을 지었을까? 학교를 지었을까?’에 대한 답으로 태어나서 연필 한 자루 쥘 기회 없이 소년병 아니면 일꾼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선생님도 자처했다. 아이들은 난생처음으로 글씨를 쓰고, 셈을 배우게 됐다. 덕분에 몇몇 학생은 ‘제2의 이태석’을 꿈꾸며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현지에서도 의사와 약사, 기자, 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며 신부님의 사랑에 보답해 나가고 있다. 남수단 최초의 음악대인 ‘톤즈 브라스 밴드’를 결성해 대통령궁에서 초청연주를 연 데 이어 손재주를 발휘해 흙담을 쌓아올리고 짚으로 지붕을 엮어 병원도 세웠다. 이뿐 아니다. 예방접종 생균백신을 냉장 보관하기 위해 독립식 태양광발전 시설을 손수 만들어 설치했다. 식수난을 해결하고자 우물을 파고,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자 농경지를 일궜다. 그렇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나눴다. 내가 그간 알고 있던 사랑과 나눔의 정의가 재정립되는 순간들이었다. 

신부님은 내게도 잊지 못할 선물을 주셨다. 늘 ‘탓’만 하며 스스로 각박하게 만들었던 삶에 ‘감사’라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씨앗, 감사가 행복의 시작임을 심게 하고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게 해주셨다. 무엇보다 뿌듯한 건 신부님과 톤즈의 이야기가 내가 직접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통해 다큐로 제작되면서 널리 알려진 거다. 섭씨 55도를 육박하는 살인적인 무더위에서 열심히 신부님을 따라다닌 보람을 느낀다. 이미 수도 없이 봐온 장면들임에도 매번 뭉클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처음엔 아프리카행을 반대했던 아내와 두 아들도 당시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곤 한다. 20년이 다 돼가지만 내 맘속 케렌시아 1번지가 여전히 아프리카인 이유도 그러하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이 시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진심을 담은 사랑과 나눔이 아닐까? "Everything is good(모든 것이 좋다)." 신부님이 남기신 마지막 유언을 되새기며 서구의 행복과 서구가 완성해나갈 가치를 더 굳건히 다져본다. 새해에는 모두에게 더없이 좋은, 곳곳에 행복이 가득한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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