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섬마을선생님 연구회 운영위원
이영태 섬마을선생님 연구회 운영위원

고려가요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가고 신대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어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당시 몽골제국의 회회아비들이 고려에서 쌍화(만두) 전문점을 개점했고 점포 앞에서 새끼광대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몽골 음식문화의 유입 사례에서 대표적인 것이 설렁탕이다. 탕(湯)이란 국을 높여 지칭하는 단어이다. 고기, 생선, 채소 등에 물을 붓고 간을 맞춰 끓인 음식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의 기록에도 국(羹)에 대한 기사가 나올 정도로 국은 우리 민족과 친밀한 음식이다. 실학자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무려 58종의 탕이 수록돼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그들의 식육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됐다. 도살법과 여러 가지 육식 조리법이 고려 초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절제했던 식생활에 많은 영향을 줬다. 특히 설렁탕과 같은 국물요리가 시작됐다. 고려 후기에는 몽고풍(風)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 등이 생겨났다. 이때 고기 조리법의 대표적인 방법이 공탕(空湯)이다. 공탕이 지금 곰탕의 원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설렁탕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 중 ‘충주 검부 앞 셜넝탕’이다. 서울 음식으로 알려진 설렁탕이 충북 충주 금부(禁府) 앞 명물로 기록된 것은 19세기 전국에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시장 음식으로 딱 맞는 설렁탕도 전국적으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설렁탕의 기원에 대해 소개하자면 첫째, ‘선농단(先農壇) 기원설’은 「조선요리학」(1940년)에 기대고 있었다.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主神)으로 제사 지내던 곳이다. 의례가 끝난 후 왕은 함께 수고한 백성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줬다. 술은 막걸리를 줬고, 음식은 소를 고기와 뼈째 푹 고은 선농탕(先農湯), 즉 설렁탕을 내렸다는 것이다. 둘째, 몽골어로 ‘고기 삶은 물’을 뜻하는 ‘슐루(슈루)’가 음운 변화를 거쳐 ‘설렁’이 됐다는 설(「몽어유해(蒙語類解), 1768년」)이 있다, 

셋째, 개성 사람 설령(薛鈴)이란 자가 고려 멸망 후 한양으로 이주해 탕반 장사를 하면서 그의 이름에서 설렁이 유래했다는 설(경향신문, 1954.8.29), 넷째, 일본의 이두 전문가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주장한 ‘설넝은 이두로 잡(雜)이라는 뜻’이라는 설 등이 있다. 캐나다 선교사 게일의 「한영자뎐 (1897년)」에는 설렁탕을 소의 모든 부위가 아닌 ‘a stew of beef intestines(소 내장으로 끓인 국)’로 설명돼 있기도 하다(조선일보, 2014.11.5.).

"내 참, 설렁탕을 시골놈이나 먹는단 말은 생전 첨 듣네. 설렁탕이란 서울의 명물이야, 서울 사람이 먹는 거란 말야. 서울 사람치구 본바닥 사람만이 진짜 설렁탕 맛을 알구 먹는 거야. 무식한 소리 어디서 함부루 해." (손창섭, 「인간동물원 초」)

흔히 설렁탕은 서울의 명물 음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몽골제국의 유목민식(式) 양고기를 중심으로 한 육식문화가 농경민인 소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음식문화로 정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렁탕은 ‘맛있는 고깃국’이란 의미로 몽골 슐렝(sulen)을 기원으로 삼는 게 가장 근리에 맞다. 예컨대 「몽골비사」 229절에도 칭기즈칸이 아침에 슐렝(sulen)을 먹는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후기부터 몽골 지배 기간이 100여 년이 넘었고, 그들의 육식문화가 지금까지도 개성, 안동, 제주지역에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설렁탕의 기원은 공탕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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