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자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자연구소 대표

시간과 시계는 근대 이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더욱이 분(分)과 시(時)가 아니라 날과 달로 시간을 헤아리는 다수의 일반인에게는 유용하고 실용적인 장치도 아니었다. 분초를 다투며 정확히 시간을 따질 절박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해가 지고 날이 밝음으로써 하루가 시작됐고 24절기(節氣)의 흐름만 잘 파악하면 정해진 시간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었다. 

반면 위정자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백성들을 쉽게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공간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지배했던 것으로 백성들이 지켜야 할 시간을 일방적으로 알려주면, 백성들은 그대로 따라야 했다. 시보(時報)는 정확한 시각을 알리는 신호다. 시간을 예보하거나 통보하는 것의 준말로 보시(報時)라 하기도 했는데, 시간을 다수와 공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보는 주로 밤 시간에 종이나 북을 쳐서 소리로 시각을 알려줬다. 8세기 신라 혜공왕(惠恭王) 때에는 속칭 에밀레종이라는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어 새벽과 저녁에 종소리로 시각을 알렸고, 이러한 시보 방식은 전근대까지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저녁 10시에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았는데 이를 인정(人定)이라 했고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라 하여 33번을 쳐서 성문을 열었다. 

인정과 파루는 야간통행금지 시작과 해제를 알려주는 하나의 시보였다. 도성 문을 일제히 닫아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하면서 도적을 예방하고 강력하게 밤 시간을 통제하는 상징적 제도였지만, 통금시간 동안에도 순관(巡官)과 군사들은 밤새 울리는 징과 북 소리에 맞추어 성내를 순시했으며 통금을 위반한 자는 다음 날 곤장을 맞았다. 

그러나 밤 시간 통제와 시보가 엄격했던 반면 낮 시간의 시보는 그렇지 못했다. 광화문에는 오고(午鼓)라 하여 임금이 정전(正殿)에서 조회(朝會)할 때 북을 쳐서 정오를 알렸다고 하나, 한낮이 돼 출근하는 관리들이 있어 오고당상(午鼓堂上)이란 조롱이 있었다 한다. 지방의 경우에도 평양과 건국 시조들의 어진(御眞)이 모셔진 전주에는 조선 초기부터 읍성의 4대문에 종을 걸어 놓고 쳤다. 

이 밖에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와 전략적인 군현, 국경 지대에서도 시보가 이뤄졌으나 일반 군현에서는 적당히 신호를 보내어 성문을 열고 닫았을 가능성이 크다. 1883년 1월 인천이 개항한 후 6월 17일 인천 해관(海關)이 문을 열고, 9월 1일부터 공식적인 기상관측이 시작되면서 서양의 시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근대적 개념의 시간이 도입됐지만 시계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기로 낮 시간을 알리는 것은 긴요한 일이었다. 

1884년 7월 12일(음력 윤5월 20일) 고종은 12시 오정(午正)과 인정 및 파루 때에 금천교(禁川橋)에서 대포를 쏘도록 전교하고 있어, 이때부터 대포(大砲) 소리로 정오(正午)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시작됐다. 그러나 1895년 11월 15일(음력 9월 29일)에 이르러 인정과 파루 때에 종치는 것을 폐지하고 정오와 자정에만 종을 쳐서 시보하게끔 칙령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기술과 경비가 수반되는 오포 발사가 지속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인천에서는 1887년 10월 일본 영사가 인천 거주 850여 명의 일본인들을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자국 및 각국 함선에 대해 매주 토요일 정오에 오포 발사를 요청함으로써 실현됐다. 이후 1905년 11월 일본거류민회는 오포 설치를 자국 육군성에 건의했는데, 1906년 2월 7일 산포(山砲)와 부속품이 도착해 2~3발을 시험 발사한 후 2월 9일부터 정식으로 오포를 발사했다. 이날은 일본이 러시아와 제물포해전에서 승리한 날로, 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정된 ‘인천시민의 날’이기도 했다. 

오포를 쏘던 응봉산은 ‘오포산(午砲山)’이라 불렸고, 오포에 이은 답동성당의 종소리는 공장이나 관공서 등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1908년 4월 1일부터는 일본의 정오에 맞춰 오포를 쏨으로써 우리나라의 오전 11시가 12시로 바뀌게 됐는데 오포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의 시간 약속 기준으로, 3·1운동의 거사도 오포 소리에 때를 맞췄다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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