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성 국제PEN한국본부 인천지역부회장
신효성 국제PEN한국본부 인천지역부회장

"종이를 펼치면 아름다운 세상이 보입니다." "온라인 매체 때문에 신문이나 책은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도 신문과 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펼칠 때마다 생생히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의 소식과 지식이 펼쳐지는 신문과 책-그 종이를 00제지가 만들고 있습니다. 00제지를 펼쳐보세요, 아름다운 세상이 보입니다!"

배달된 조간신문을 펼쳐 읽는데 제지회사 두 곳의 전면 광고가 눈에 띄었다. 위의 광고는 두 회사 중 한 회사의 광고 문구다. 동종업계 두 곳의 전면광고가 동시에 실리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 종이와 연관이 깊은 날인가? 궁금증이 생겼다. 한국제지연합회에서 ‘종이의날’로 제정한 날은 6월 16일이라 한참 뒤다. 팬데믹 세상에서 종이의 역할이 중요해져 수요가 폭등한 것일 수도 있고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일 수도 있는 광고인데 종이 관련 광고라서 관심이 생긴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라 종이는 뗄 수 없는 친숙으로 삶 속에 스며들어 있다. 활자화된 인쇄물을 읽는 일상이 가끔은 활자 중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자책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선호도를 높이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10% 정도라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종이책이나 종이매체를 선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종이가 주는 정감이 편안해서, 종이는 바로 메모가 가능해서, 질감과 향기가 좋아서, 해킹 우려가 없는 안전성이 보장되고 재사용이 가능한 자원이라서 등등 개인의 기호와 편의에 따른 호감도가 높아서다. 

종이를 넘길 때 손끝에 닿는 촉감, 가독성과 열람성, 필기감,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형태의 자유로움 등 첨단 디지털이 넘지 못하는 종이가 갖는 편의성이 굳건해 사랑을 받고 있다. 후한 시대 채륜이 발명한 종이 제조 기술이 한반도로 전해지고 다시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제지술을 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 선조들은 제지 기술의 꽃을 피워 1천 년 이상을 견디는 한지를 만들어냈다. 

이 한지는 세계 최고(最古) 인쇄 기술 국가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됐다. 751년께 한지 두루마리에 인쇄한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1377년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 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았다. 인쇄술 발전과 제지 기술은 불가분의 관계다. 

인류 문명의 위대한 발명품을 꼽으라면 종이를 빼놓을 수 없다. 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듯이 종이는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 썩지 않아 지구를 병들게 하는 대표적인 환경오염 물건인 플라스틱 제품에 펄프를 혼합해 친환경 생분해성 플라스틱을 만들어 내고 우주선의 동체에도 의료용으로도 건축자재로도 방어용 의류에도 전자제품에도,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우리나라에 제지산업이 태동한 지가 120년쯤이 됐다고 하는데 세계 굴지의 최첨단 제지 생산 국가가 된 데는 천년을 훨씬 넘는 세월에도 보존 가능한 종이, 한지를 만들어 낸 저력이 한몫했을 것이라고 자찬을 해 본다. 미래에는 종이에 첨단 기술을 입혀서 상상 이상의 물건을 만들어낼 터지만 내게는 종이로 만든 책과 노트 편지지로 오는 감성이 크다. 읽을 책이 쌓여 있으면 통장이 두둑한 것 같고 문득 떠오르는 시상을 적어 놓을 노트가 있으면 안심이 되고 예쁜 편지지를 사는 일도 즐겁다.

손편지가 멸족한 시대라고는 하는데 종종 편지지에 편지를 쓴다. 손글씨 글자마다 그 사람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진중해진다. 종이의 역할이 진화해서 일상에서 귀해지는 날이 온다 해도 종이책을 읽고 노트에 시상을 메모하고 마음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면서 세월을 저장하며 살아갈 것이다. 제지 회사의 전면광고 덕분에 종이의 예스러운 유용을 생각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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