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하고 고단한 삶이다. 물질을 너무 많이 해 양손 검지와 중지가 휘어 이제 접을 만도 한데 여직 가게를 연다. 그렇게 47년이다. 쇠심줄 같이 질긴 자가제면(전분 7대 메밀 3)으로 이어온 삶이 그렇듯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하루에 수천 그릇의 냉면을 팔던 문전성시는 이제 없는데도 말이다. 바통을 이어야 하거늘 이마저도 어렵다. 그래도 백년가게 함흥냉면(인천시 부평구)의 시곗바늘은 돌아간다. 잊지 않고 찾는 단골이 있어서다.

함흥냉면의 창업주인 허흥례 대표와 가게를 함께 운영 중인 조용철 씨가 지난달 22일 가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함흥냉면의 창업주인 허흥례 대표와 가게를 함께 운영 중인 조용철 씨가 지난달 22일 가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넘사벽 인천 ‘함흥냉면’

 북한 함경도식 함흥냉면은 창업주 허흥례(78·여)씨와 남편 고(故) 배용철 씨가 1974년 부평 금성극장 인근에서 문을 열었다. 현재는 남편과 함께 조리법을 전수받은 이종사촌시동생 조용철(74)씨가 함께 운영 중이다.

 창업주와 남편이 서울 종로3가에서 살던 당시 이종사촌 조 씨와 북한 함흥지역에서 월남한 냉면 기술자에게 전수받은 게 인천 함흥냉면의 단초가 됐다. 남다른 손재주가 있던 배 씨는 1968년 부평극장 인근 함흥냉면에서 일하면서 업계에서는 자가제면 기술자로 이름을 알렸다. 꿩냉면으로 경쟁했던 인근 ‘식도원’이 문을 닫은 원인도 배 씨가 함흥냉면에서 일하면서라고 하니 면 뽑는 실력만큼은 으뜸으로 쳐야 할 테다

인천 부평구 함흥냉면 전경.
인천 부평구 함흥냉면 전경.

 이후 직접 가게를 운영한 이들 부부는 창업 5년 만인 1979년 1~2층의 건물을 얻었다. 하루에 판 냉면만 1천500그릇에 달했다고 하는데, 1968년 10원짜리 냉면이 지금은 8천 원인 것을 고려하면 현재 화폐가치로는 일 1천만 원이 훌쩍 넘는 매출이다. 직원만 20명이었으니 당시 함흥냉면의 위상은 요즘 말로 ‘넘사벽’이었다.

 허 씨는 "손님이 끊이지 않고 늘 가게는 붐볐다. 지금은 함흥냉면이라는 상호가 많이 생겨 흔하게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우리 가게가 유일해 경기도 광명에서도 찾아와 먹을 정도로 단골고객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함흥냉면 대표 메뉴 회냉면.
함흥냉면 대표 메뉴 회냉면.

 복에는 화가 있고, 명과 암은 늘 같이 있다고 잘된 장사만큼 시련도 있었던 함흥냉면이다. 밤낮 모르게 일했던 배 씨가 1997년 사망하기까지 8년이라는 오랜 투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랬던 함흥냉면은 2002년 지금의 가게로 옮겨 명맥을 잇고 있다. 늘 한결같이 찾아주는 단골 때문에 문을 닫을 수 없다는 게 조 씨의 다짐이다. 단골과 입소문을 듣고 찾는 반가운 손님이 백년가게 함흥냉면의 버팀목인 셈이다. 먹기에도 여간 쉽지 않다는 자가제면을 뽑는 일이 힘이 부칠 만도 한데 손을 놓지 못하는 질긴 인연은 함흥냉면과 궤를 같이 하나 보다.

주방에서 조용철 씨가 면반죽을 뽑고 있다.
주방에서 조용철 씨가 면반죽을 뽑고 있다.

# 쇠심줄 같은 함흥냉면 ‘매콤함’ 취한다

 함흥냉면은 매운 비빔냉면이다. 북한의 함흥에서 회국수라고 불린 음식이 남한에서 실향민을 달래는 함흥냉면으로 변형됐다. 원래 감자전분이 주원료였는데 남한 사정에 맞게 고구마전분으로 면을 뽑게 됐다. 펄펄 끓는 물은 안 된다. 90℃의 온수를 맞추기 위해 찬물을 끼얹는 노하우는 면을 뽑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작업이다. 이렇게 나온 면은 질기고 탄성이 있어 칼질 없이는 먹기가 힘들기로 유명하다. 쇠심줄 면발 탓에 주방에서는 등판 위로 그릇째 내려치면서 비벼내야 할 정도다.  

 조 씨는 "면이 얼마나 질긴지 먹을 때는 목구멍에 한 묶음, 입에 한 묶음을 넣어 우걱우걱 거릴 정도로 끊어지지가 않았다"며 "나이 든 노인이 오면 등판에다 칼질을 해서 내어줬다"고 자가제면의 특성을 소개했다. 

 면을 잘라내는 등판이 목재에서 스텐으로 바뀌면서 칼질이 어려워지자 등장한 것이 가위다. 가위를 처음 시작한 이가 본인이라는 자랑을 냉면 위의 고명처럼 슬쩍 얹어 놓는다. 함흥냉면의 오랜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듯 자부심이 한껏 묻어난다. 

허흥례 대표가 배달을 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허흥례 대표가 배달을 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조 씨의 함흥냉면에는 특이한 조리법이 있다. 매콤한 본연의 맛도 일품이지만 조 씨가 조제해 비벼 주는 양념이 그 비법이다. 설탕과 식초 그리고 연겨자를 조 씨만의 눈대중으로 넣어 비벼 주는 ‘조 씨표 함흥냉면’이다. 맛을 본 이라면 늘 순서를 기다리게 한다.

 조 씨는 "손님이 요구하면 면을 더 주는데 젊은 사람들은 가끔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젊은 사람 입맛에 직접 양념을 하면 남기지 않고 다 먹더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거기다 냉면 한 뭉텅이를 더 얹어 주는 인심은 백년가게만이 갖고 있는 최고의 양념이다.

 함흥냉면과 곁들이는 짭조름한 냉육수는 여름철 매콤한 물냉면으로도 먹을 수 있는 흔치 않는 별미이다. 뼈로 우려낸 육수 잡내를 잡기 위해 넣은 계피, 감초, 고추씨로 만든 냉육수는 여름철 손가락 담가 가며 한 사발 들이켜도 좋을 듯하다. 문의:함흥냉면 ☎032-503-8054, 인천시 부평구 시장로20번길 21  

안재균 기자 ajk@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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