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니까 채워진다. 그러려고 비운 게 아닌데 말이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미래에 대한 공허함이 백년가게로 가득 채운다. 누구보다 자신 있어 시작했기에 일말의 후회는 없다. 실패의 기억은 쓰라리지만 그 흔적은 긴 인생항로에 방향타가 됐다. 백년가게가 가야 할 길 중 하나가 아닐까.
공교롭다. 비우고 채우는 게 먹고사는 일이 됐다. 평생 함께 할 천연인 것이다. 채웠으니 또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그렇게 신포순대는 하루를 시작한다.
# 신포동에서 만든 순대
백년가게 신포순대는 1978년 신포시장에서 창업했다. 창업자 김일순(73·여)씨가 좌판을 놓고 시작한 순대국밥이 시장 내에서 알아주는 먹거리로 인기를 누린 지 44년이 됐다. 쫄면, 닭강정, 만두, 공갈빵 등 다른 유명 먹거리 틈새에서 신포시장의 입맛을 사로잡았으니 맛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게다. 장사 시작 6개월 만에 가게를 얻으면서 노점생활을 청산했다.
그 시절 김 씨에게는 밀려드는 손님에 늘 순대물량 확보가 고민거리였다. 그렇다고 검증되지 않은 식재료를 사용한 순대는 늘 피해야 했다. 결국 순대를 직접 만들기로 하면서 신포동에서 만든 순대 ‘신포순대’가 백년을 시작하게 된다. 쫀득하고 담백한 신포순대가 탄생한 것이다.
# 순대집 외아들, 양순대집 사장 된 사연
2대 사장 서인성(52)씨는 김 씨의 외아들이다. 가업을 이은 백년가게 사장으로는 몇 안 되는 해외 유학파이기도 했다. 웹디자인이 전공인 서 씨는 유학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가게 운영에 더없는 자산이다. 해외에서 보고 배운 용돈벌이 덕에 제2의 신포순대 전성기를 맞고 있어서다.
물론 눈물겨운 창업 실패는 없어서는 안 될 경험이기도 했다. 서 씨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02년은 대한민국에 창업 붐이 크게 일었던 시기이다. 2001년 8월 23일 IMF(국제통화기금)의 지원자금을 전액 상환하면서 다시 경제를 일으켜야 하는 시기로, 서 씨 역시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사업아이템은 소시지, 다시 표현하면 ‘양순대’다. 순대집 외아들이 양순대를 만들어 판다는 얘기다. 어차피 순대라고 하면 매 맞을 얘기지만, 훗날 가업을 이을 수밖에 없는 인연의 시작이 심술궂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잘됐으면 좋았을 터인데 시국이 안 좋았던 것일까. 만들어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장사에 배겨날 수가 없었던 서 씨는 결국 실패라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서 씨는 "선진지 입맛을 국내에 적용해 젊은 층을 사로잡기에는 시국이 나에게는 안 맞았던 것 같다. 가장 큰 문제가 물가에 맞지 않는 가격이었는데 결국 문을 닫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소시지 사업 실패 이후에도 서 씨의 도전은 계속됐다. 이어서 추진한 사업이 신포순대의 프랜차이즈화다. 이를 위해 그는 한양대학교에서 ‘HACCP(해썹)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해썹은 식품 생산부터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최종 단계까지 품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신포순대 프랜차이즈 역시 쉽지는 않았다.
서 씨는 "신포순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시작한 프랜차이즈 사업이었다"며 "똑같은 국밥 육수와 순대라고 생각했는데 본점에서 체인점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 맛이 변하면서 본점과 같은 고객 유치에는 실패했다"고 전했다.
# 제2의 전성기 신포순대
실패했다고 다 끝난 건 아니다. 지루한 얘기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처절한 실패의 양분은 더 좋은 결실을 맺었다. 코로나19 시국에 다 힘들다는 자영업자들에게 서 씨는 괜스레 소극적인 모습이다. 손님도 줄고 매출도 줄었는데 말이다. 비결은 소시지에서 얻은 신메뉴 개발에 있었다. 고추순대, 카레순대 그리고 염지족발로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대에서 완성한 신포순대에 서구의 햄 제조 기법을 접목해 재해석한 것이다.
이를 위해 서 씨는 아예 지하에 순대공장을 차렸다. 여느 프랜차이즈 사업장 못지않게 철저한 식재료 관리부터 재료 생산까지 도맡으면서 내실을 차곡차곡 다지고 있는 그다.
그런 서 씨에게는 코로나19가 되레 신포순대의 미래를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 신포순대만의 메뉴를 온라인에서도 판매하게 된 것이다. 순대 물량은 직접 생산해 조달하니 주문량이 많아도 감당할 수 있는 사업이다.
이렇게 시작된 온라인 사업은 코로나19로 줄어든 매출을 만회하는 결과로 되돌아왔다. 현재 매장 매출 60%, 포장주문 40%를 기록 중이다.
서 씨는 "백년가게들이 코로나19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 오지도 않을 손님을 기다리면서 장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신포순대가 시작한 온라인 판매는 인천 백년가게들에게도 꼭 필요한 사업이 될 것이다. 옆에서 도울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안재균 기자 ajk@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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