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주필
원현린 주필

"남북한이 각각 다른 의석으로 UN에 가입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며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통일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간 단계입니다. 우리 UN대표단의 자리가 옵서버석에서 회원석으로 불과 수십m 옮겨 오는 데 40년이 걸렸고, 동·서독의 두 의석이 하나로 합쳐지는 데는 17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두 의석이 하나로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상기 문장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한 해인 1991년 9월 24일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이 제46차 UN총회장에서 행한 ‘평화로운 하나의 세계공동체를 향하여’라는 연설문 중 일부다.

노 대통령이 "두 의석이 하나로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넓은 총회장 내 참석국 대표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당시 총회 취재 차 특파됐던 필자를 비롯한 모두가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음 해인 1992년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은 같은 자리에서 ‘평화와 번영의 21세기를 향하여’라는 제하의 제47차 UN총회 연설을 이어갔다. 우리의 UN 가입 이후 역대 대통령들도 하나같이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내용으로 UN총회장을 찾아 연설을 해 오고 있다. 

우리의 UN 가입을 가로막아 온 것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 즉 미·소 간 냉전체제였다. 구(舊) 소련이 무너지면서 세계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기대를 모았었다.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흘렀다. 두 의석이 하나로 합쳐지기는커녕 미사일 경쟁 구도 속에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UN총회장에서 제76차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나는 오늘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해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 주실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하며,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에는 한반도 ‘종전선언’을 제안했다"며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올해는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라고 언급하며 "UN 동시 가입은 결코 분단을 영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교류도, 화해도, 통일로 나아가는 길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취임 후 첫 UN 연설에 나선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이날 "북한과 이란, 두 나라의 비핵화를 미국은 계속 추구하겠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기 위해 진지하고 지속적인 외교를 추구한다"고 밝혔다. 

바이든은 군사적 충돌을 원하지 않으며 새로운 냉전을 추구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총회를 앞두고 AP와의 인터뷰에서 20세기 미국과 소련 간 불거졌던 냉전에 이은 ‘미·중 신냉전’을 경고하며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금도 진전 없는 남북관계다. 그토록 평화를 강조하며 잘 다듬어진 연설 내용들은 하나같이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이었는가. 기술한 것처럼 남북 관계의 진전을 막은 것이 냉전이라 했듯이 지금 이 시각,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냉전 분위기가 형성돼 또다시 남북한 간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 UN에서의 두 의석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그야말로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理想鄕)인가?

구테흐스 총장의 ‘완전히 망가진 관계 회복’이라는 충고는 미·중 관계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회복에도 옳은 지적이라 하겠다. 

UN의 목적은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 국가 간 선린관계 발전,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존중을 위한 국제적 협력 등이다. UN의 기본적인 목적조차 잊고 있는 회원국들이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남북 대화와 세계 평화만을 외치고 있는 우리를 비롯한 세계 유엔 가입국 정상들이다. 말로만의 평화, 그것은 예전에도 그랬다. 여기서 ‘UN 무용론’도 나온다. 30년 전 남북한 UN 동시 가입 당시를 비롯해 두 차례에 걸쳐 UN총회에 참석했던 필자로서는 말 그대로 ‘UN에 대한 유감(遺憾)’이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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